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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없고 허무한 액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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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없고 허무한 액션만
  • 라제기 기자
  • 승인 2016.05.26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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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에 빠진 충무로의 어둠

어설픈 설정과 이야기 개연성 부족

액션만 강조하다 관객에 외면 받아

우는 남자
우는 남자
황제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하이힐
하이힐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이중배상>(1944)은 필름 누아르의 탄생을 알린 영화로 꼽힌다. 보험회사 직원 월터(프레드 맥머레이)와 유부녀 필리스(바바라 스탠윅)가 공모한 살인극을 스크린에 펼친다. 필리스는 막대한 보험금을 타려고 월터를 유혹해 남편을 살해하려 하고, 월터는 미녀와 일확천금을 한 번에 손에 쥘 수 있으리라는 망상으로 범죄에 빠져든다. 그리고 결국 둘은 예정된 파멸에 이른다.

<이중배상>은 한 사내가 미모를 지닌 악녀에 의해 급속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통해 필름 누아르의 전형성을 제시했다. 월터와 필리스의 음험한 계획과 피에 젖은 최후는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상징하기도 한다. 필름 누아르는 <이중배상>처럼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의 몰락을 통해 자본주의 대표국가 미국의 일그러진 사회상을 비판하곤 했다.

필름 누아르는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호명됐다. 우위썬 감독의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등 홍콩 뒷골목 사나이들의 핏빛 사연을 그린 영화들이 언론으로부터 홍콩 누아르라 불리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나기처럼 총알이 퍼붓는 비현실적인 액션 장면으로 비장미를 한껏 강조한 홍콩 누아르는 필름 누아르와는 별 연관이 없다. ‘어둡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누아르(Noir)만을 따와 한국 극장가에서만 유행한 신조어였다.

태생 불명의 홍콩 누아르는 한국형 누아르로 가지를 뻗었다. 피비린내 나는 조폭 영화나 형사물이 누아르란 포장을 둘렀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가 큰 전환점이었다. <친구>의 흥행몰이로 회칼과 쇠파이프(간혹 권총까지)가 충무로 누아르의 상징이 됐다. 사내들의 진한 우정이 선홍색 피와 만나 종종 과장된 비장미를 연출했다. 누아르라는 수식은 액션이 풍부한 남자영화를 대변하게 됐다.

누아르를 표방한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했다. 킬러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스크린을 피로 적시는 <우는 남자>(감독 이정범)와, 여자가 되고픈 열혈 형사와 조폭의 대결을 묘사한 <하이힐>, 뒷골목에 스며든 야구선수 출신 한 사내의 질풍노도를 전하는 <황제를 위하여>.

공교롭게도 세 영화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우는 남자>는 지난 16일까지 58만3538명이 봐 ‘우는 영화’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하이힐>은 31만 6884명, <황제를 위하여>도 34만5833명이 관람했을 뿐이다. 그나마 주연배우 이민기와 이태임의 진한 침실 장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관객 수라는 냉소가 따른다.

트랜스젠더와 액션영화를 결합하려 한 <하이힐>을 제외하면 <우는 남자>와 <황제를 위하여>의 이야기 구성은 진부하다. 장편 극영화라는 정체성을 지녔는데 ‘극’의 구축에 너무나 소홀하다. 이야기는 간데없고 그저 총을 마구 쏘거나 회칼과 쇠파이프를 무시로 휘두르는 장면만 난무한다. <우는 남자>의 킬러 곤(장동건)이 자신의 타깃이 된 여자 모경(김민희)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황제를 위하여>는 아예 요령부득이다. 세 영화는 어두운 기운만을 강조할 뿐 필름 누아르처럼 지금, 이곳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지도 않는다.

충무로는 언제부터인가 커다란 착각에 빠져있는 듯하다. 자극적인 장면과 그럴 듯한 액션만으로도 관객을 모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관객들도 충무로의 태만을 눈치 챈 것일까. 지난 15일 기준 올해 한국영화 관객 수는 4015만 385명으로 시장 점유율 44.7%를 기록했다. 할리우드영화는 4515만 7129명으로 50.3%를 차지했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59.9%였다. 올해 한국영화 관객 수가 1억 명을 넘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충무로는 최근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며 2년 연속 1억 관객을 기록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될 것인가. 최근 누아르 영화만으로도 충무로엔 어두운 먹장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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