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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국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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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국적이 없다
  • 정병조(철학박사, 금강대 총장)
  • 승인 2014.08.0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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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 호국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호국불교’ 타당한가

영토·국민 지키기 급급하면 국수주의 전락

인도 민족성 고집했다면 세계 종교 불가능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산대사 영정. 서산대사는 한국 호국불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산대사 영정. 서산대사는 한국 호국불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정병조 철학박사
정병조 철학박사

한국불교의 특징을 요약하는 수식어 가운데 호국불교라는 주장이 있다. 한국불교는 4세기 초반 도입부터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고 성장하였다. 따라서 국난을 당했을 때 불교가 궐기했던 것은 필연적인 보은일수 있다. 신라의 화랑, 고려 몽고의 병란 때 고려대장경 조성, 그리고 임진왜란 때 승군의 활동 등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우리나라를 수호하고 국토를 지키는 종교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국불교가 한국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일본과 중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의 불교가 제 나라 망하라고 빌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한국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정에 앞서 절을 참배하는 장면은 퍽 곤혹스럽다. 그는 부처님 전에 일본군사는 터럭하나 다치지 않고 한국군은 다 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지 않았을까. 일본군이 우리강토를 초토화시킬 때 묘향산에 있었던 서산대사는 무엇을 빌었을까. 일본군은 몰살하고 조선군사와 백성은 저들의 칼날 앞에서 무사해야 된다고 기도를 올렸음이 자명하다.

만약 불교가 저마다의 영토, 자신의 국민 지키기에만 급급하다면, 결국 불교는 낡은 국수주의(國粹主義)로 전락해 버릴 뿐이다. 불교는 결코 국가지상주의나 민족제일주의 따위에 기울어질 수 없는 종교이다.

국토 보다는 출세간(出世間)을 염원하였으며 개인의 영달 보다는 중생의 행복을 염원하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던가. 따라서 맹목적으로 한국적 정서에 아부하는 이와 같은 주장들은 오히려 한국불교의 위대성을 감소시키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호국불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하는 고민이 남는다. 그 해답은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전의 제목에서 보듯이 지도자[仁王]가 반야에 의해서 국가를 통솔하는 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신라·고려 때에는 매우 존숭 받았던 불교경전으로서 이 가르침에 의거해서 거국적인 불사(佛事)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즉 <인왕경>은 고대사회의 절대 권력자가 지녀야 할 자질, 통솔력 등에 대한 교훈서였던 셈이다. 절 이름 가운데 임금 왕(王)자가 들어가는 사찰들은 거의 이 호국적 성격의 절이다. 경주의 황룡사, 황복사, 개성의 왕흥사(王興寺) 등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거찰(巨刹)들이었다. 임금은 정기적으로 이 국가적 법회에 참석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며 국가안위에 관한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인왕(仁王)의 어질 ‘인’자는 참을 ‘인(忍)’자와 동음(同音)이다. 즉 어질다는 것은 비방과 칭찬 사이에서 동요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무릇 지도자는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실리를 외면하지 않는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와 같은 인왕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반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는 ‘절대완전의 지혜’를 가리킨다. 수행자는 반야를 지님으로써 성불에 이를 수 있다.

한편 세속의 반야는 사바세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편이다. 반야를 지닌 군주라야 비로소 국토와 국민들을 평안케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국토’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인왕경>은 명백하게 그 개념을 서술하고 있다. 국토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그 대지의 동서남북에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서원이 있는 곳이라고 못 박았다. 흔히 사성제라고 하지만, 이 네 가지의 불교적 진리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진리가 살아서 숨 쉬는 곳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호국을 오늘날 말하는 영토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호법(護法), 즉 불교의 진리를 수호한다는 색채가 강하다. 한국불교의 위인들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 고결한 피 땀을 무정한 산하에 뿌렸던 것이다. 불교에는 국적이 없지만 불교인들에게는 국적이 있었다. 이 차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국가 불교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인도의 불교가 인도적 민족성을 고집했다면, 불교는 그 고향에서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적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인도의 불교는 세계의 불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질적(質的)인 차이를 무시하고, 단순논리로서 호국불교를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가라는 단위는 개인의 차원보다 월등 높고 큰 개념이다. 그러나 법, 즉 진리는 그 국가 보다 훨씬 장대한 상위개념이다. 한국의 호국불교는 결국 중생의 불교, 불법(佛法)의 불교를 실현하려는 원대한 이상의 발로였다.

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호법의 강한 의지를 불사른 영령들께 두 손 모아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의지가 바로 미래 대한민국의 튼튼한 주춧돌이라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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