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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극복하는 적극적 현실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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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극복하는 적극적 현실참여
  • 정병조(철학박사, 금강대 총장)
  • 승인 2014.08.06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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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 불살생(不殺生)
산목숨을 해치지 않는다는 ‘불살생’을 표현하고 있는 인도 라다크 한 사찰의 벽화. ‘불살생’은 단순한 소극적 권장사항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적극적 현실참여로 해석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불살생’을 지구온난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는 환경론자들이 늘고 있다.
산목숨을 해치지 않는다는 ‘불살생’을 표현하고 있는 인도 라다크 한 사찰의 벽화. ‘불살생’은 단순한 소극적 권장사항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적극적 현실참여로 해석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불살생’을 지구온난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는 환경론자들이 늘고 있다.

종교적 형식주의로 폄하해선 안 돼

‘불교생태학’ 지구온난화 대안 각광

환경·생명 등 새로운 형태 불교 절실

정병조 박사
정병조 박사

불교 오계(五戒)의 첫머리는 불살생(不殺生), 즉 산목숨을 해치지 않겠다는 서원에서부터 출발한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인데 비해 사뭇 다른 형태이다. ‘산목숨’이라는 개념은 살려는 의지를 지닌 여러 동물들, 심지어는 미생물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간혹 이 불살생을 종교적 형식주의로 폄하하는 견해도 있다. 자연의 조화로 설명되는 약육강식이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이치에도 동떨어진 나이브한 패배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 불살생을 강조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모든 생명은 살고자 한다. 인지가 발달해서, 혹은 힘이 강해서 상대를 죽여 없애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불교적 가치관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끝없는 윤회의 나락 속에 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생명체처럼 보이지만. 다겁(多劫)의 윤회를 이해하면 이 미물들은 나의 전생일 수도 있고, 내 부모처자 일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살생은 우리들 마음속의 착한 종자를 끊어 버린다. 자비의 마음 대신 적개심, 복수심으로 물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소 상식적인 표현이지만 원한은 결코 원한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용서만이 원한을 잠재울 수 있는 묘약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오해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즉 불살생은 스님들만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불자의 조건은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준수하는 일이었다. 서양종교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았는지, 주일마다 예배를 보는지, 십일조를 준수하는지 등의 여부로 신자를 판별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와 같은 기준으로 불자인지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삼귀의를 받아들이고 오계를 준수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의 여부로 불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계는 불자임을 천명하는 첫 번째 스텝 일뿐,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룰이 아니다.

식육(食肉)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안 먹을 수 있으면 좋고, 부득이 먹을 경우에도 절제할 것이 요구된다. 또 네발 달린 짐승보다는 두발, 두발 보다는 발이 없는 물고기 순으로 먹는 것이 순리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왜 고기를 먹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필수의 영양 섭취, 건강 등을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채식주의자들이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성인병도 현저하게 줄고, 인체 여러 기관에 주는 스트레스도 훨씬 감소한다. 고기를 먹는 이유는 단순하다. ‘맛있어서’ 먹는 것을 갖가지 그럴싸한 이유로 포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임상학적인 통계자료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님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고혈압·당뇨 등이 확실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니 ‘웰빙’이니 하는 호들갑도 따지고 보면 채식과 선정(마음공부)의 다른 포장일 따름이다. 서양에서는 이 불교의 불살생 정신이야말로 공해를 막고 지구 온난화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첩경이라고 주장하는 환경론자들이 많다. 이것을 불교생태학(Buddhist Ecology) 이라고 한다. 일종의 응용불교학이다. 그동안의 불교공부는 주로 교리적인 탐구와 선적(禪的)인 실천의지에 초점을 맞춰왔다. 물론 우주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논구(論究)는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일은 현재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급진적 혁명을 주장하는 해방신학 등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종교의 본분은 아니다. 오늘의 문제를 각자가 가진 불교적 신념으로 해석하고, 그로부터의 탈피를 모색하는 것을 우리는 응용불교(Applied Buddhism) 라고 부를 수 있다.

지난 세기까지 인류가 가졌던 핵심적 과제는 ‘실존’의 문제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종교뿐 아니라 철학, 문학, 심리학의 공통적 관심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인류는 더 이상 실존의 문제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환경과 생명’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불교는 더 이상 ‘착하게 살라’는 교훈적 설법만을 늘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도전을 심각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불교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해석이다.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불교이다. 이제까지 없던 형태의 새로운 불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태까지 당연시 했던 불교를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살생을 단순히 소극적 권장사항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불살생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적극적 현실참여이다. 불교의 장점으로 손꼽혀온 겸양과 조화, 절제와 자비의 미덕 또한 이 불살생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실천의지이다. 오늘날 불교의 문제는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대규모의 법당과 대불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대중의 공감을 얻어낼 눈 밝은 납자(衲子)들이 부족하고 불교의 이상을 현실 속에 실천할 의지의 불자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다운 불교만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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