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순환 또한 신통력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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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순환 또한 신통력 아니던가
  • 정병조(철학박사, 금강대 총장)
  • 승인 2014.08.0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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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 육신통(六神通)
계절의 순환 또한 신통력이 아니던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엇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도 아니다. 옛 철인(哲人)들은 이를 섭리라고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다르마(Dharma)라고 부른다.
계절의 순환 또한 신통력이 아니던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엇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도 아니다. 옛 철인(哲人)들은 이를 섭리라고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다르마(Dharma)라고 부른다.

불교를 통해 나의 내면이 변화한다는 뜻

내면의 변화, 주변 환경까지 바꿀 수 있어

정병조
정병조

불교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매력적인 언사는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손오공처럼 허공을 날고 제갈량처럼 겨울에 동남풍을 불러 올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성불이라는 어렵고 요령부득의 개념보다 훨씬 친근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바깥에서 쳐다본 불교와 내부에서의 정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불교를 몰랐을 때 사찰이나 스님들에 대한 시각은 다분히 신비적 경향이 짙었다. 사주팔자도 잘 볼 것 같았고 축지법도 구사할 듯 보였다.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준적이 있다. "수행을 오래한 이에게 남의 운명을 알아맞히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남의 미래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그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몇 년 몇 월에 어디에서 어떻게 죽는가를 알았을 때,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도 주지스님들에게는 공통의 고민이 있다. 처음 부임하면 신도들의 관심사는 온통 우리 스님의 신통력에 집중되어 있다. 이사날짜에서부터 결혼식 택일까지, 또 집안 원혼들에 대한 천도의식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점이다.

나도 불교공부를 시작한 5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신통력을 얻으려고 무진 노력하였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답시고 했는데 신통력과는 십만팔천리이다. 하늘의 일을 꿰뚫고(天眼), 남의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他心) 등 형언하기 어려운 도술들이 망라되어 여섯 가지 신통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숙명통(宿命通), 즉 전생의 일을 알기는커녕, 현재의 속박에서 허덕이고 있고, 타심통은커녕 제 마음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최근 들어서 나는 육신통의 ‘여섯’ 이라는 숫자에 주목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숫자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근본교리에서도 사제팔정도, 즉 4와 8이 중요시되고, 육바라밀, 육신통처럼 6이라는 숫자도 중요하다. 또 십지, 십회향 등 10이라는 숫자에도 의미를 둔다. 이것을 법수(法數)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홀수 보다는 짝수를 선호한다. 홀수를 쓰는 경우도 있다. 탑의 층수는 예외 없이 3층, 5층 등인데 그 경우는 짝수라는 만수(滿數)로 가기위한 예비단계라는 의미가 강하다.

신통력을 나타내는 6이라는 숫자는 주로 인간의 내면 요인을 규정하는 숫자이다. 육근(六根)이라고 하는데, 인격의 여섯 가지 기능을 가리킨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마음을 쓰는 일은 인격의 기본이다. 앞서 말한 육신통은 하늘이니, 전생이니 하는 개념들이 있지만, 전부 이 인격의 주체 여섯 가지와 배열도 똑같다. 이 주관적 육근의 대상이 육경(六境)이다. ‘나’라는 주관과 또 각각의 대상이 일으키는 작용이 번뇌이다. 6×6=36 이고, 여기에 전생·금생·내생의 세제곱을 하면 108 번뇌가 된다.

따라서 육신통의 근본적 의미는 불교를 통해 나의 내면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그 내면의 변화가 서서히 나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불교를 공부하지 않았을 때는 원한과 저주의 대상이었지만, 불교공부 한 이후에는 용서를 배운다. 불교를 모를 때에는 한없는 집착과 번민 뿐 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즉 신통력이란 불교를 통한 내면의 승화를 뜻한다.

아직도 우리 주변의 많은 불자들은 불교를 믿음으로써 스스로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 한다. 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 하며, 한번 올라가면 만수무강하게 버텨야 부처님 영험이 지중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삶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원망(願望) 심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려는 점은 그것만이 종교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뜻이다. 한국 종교를 비판하는 상투적 표현 가운데 <기복종교>라는 말이 있다. 종교를 통해 복을 받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온통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만을 투영(投影)해서는 안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말하면 나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신통력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젊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많이 너그러워 졌고 겸손해졌다. 제법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할 줄도 알고, 분노를 절제할 줄도 안다. 아마 보살의 열 단계 성취가운데 초지(初地) 정도를 밟지 않았나 싶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캠퍼스에는 또 다시 젊음이 흘러넘치고, 동면을 끝낸 대지에는 꽃소식이 피어오른다. 이 계절의 순환 또한 신통력이 아니던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엇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도 아니다. 옛 철인(哲人)들은 이를 섭리라고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다르마(Dharma)라고 부른다. 다르마의 합창 역시 신통력이었는데, 그것을 미처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신통력을 부리려고 잘못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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