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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제의 길을 갈라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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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제의 길을 갈라놓다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11.26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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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야기 | 안동김씨

이성계의 부름 마다했던 ‘김사렴’
조선의 1등 개국공신 오른 ‘김사형’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김사렴의 묘.


고려 말 충신 안동김씨 김사렴(金士廉)의 충절은 후세에까지 귀감으로 통한다.

김사렴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으며,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1328~1396)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집현전 대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김사렴은 그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고 탄핵하였다. 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사렴이 홀로 탄핵을 한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청주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거절하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두문불출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양 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고려의 신하로 군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보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신순(身殉: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하지도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을 뵐 것인가, 내가 죽은 뒤 심심산중에 묻어 봉토(封土)하지 말며 돌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손들에게는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김사렴의 묘는 그가 죽은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에 후손들에 의해 석곽 중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즉시 봉분을 만들어 시향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묘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언덕에 있다.

영모재는 1678년 김사렴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세웠으며 김사렴 묘소의 재궁으로 쓰이고 있다.

숙종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는 과제(課題)로 과거 응시생들에게 과거(科擧)를 보였고, 우암 송시열은 충병일월 절고산악 일편도산 만고수양(忠昞日月 節高山岳 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 김사형의 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 김사형의 묘.

형은 고려 충신, 동생은 조선 충신

그러나 김사렴의 동생 김사형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김사형(金士衡, 1332~1407, 호는 낙포, 시호 익원 翼元)은 조선의 좌의정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김사형은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년(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 구신이며 가문이 귀하고 높았으며 마음이 청고해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결단하였다.

대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제1집 김사형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 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김질, 영의정 김수동, 이조판서 김찬, 근대인물로 백범 김구 선생 등이 나왔다.

김사렴의 재실 영모재 모습
김사렴의 재실 영모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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