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왜군도 감복한 임진란의 영웅‘변응정’
상태바
왜군도 감복한 임진란의 영웅‘변응정’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10.28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씨 이야기 | 원주변씨
세종시 전동면 청남리에 있는 변응정 장군 사당(신축 전후 모습)
세종시 전동면 청남리에 있는 변응정 장군 사당(신축 전후 모습)

조선시대 충신 변응정(邊應井)은 정사년(1557년, 명종 12년) 10월에 태어났다. 공의 자(字)는 문숙(文淑)이다.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지자 개연히 붓을 던져버리려는 마음을 가졌었는데, 중부(仲父)인 판서공(判書公) 변협(邊協)이 힘써 권면했다.

공의 나이 29세에 무과에 응시하여 낙방하였는데, 그때에 북변(北邊)에 일이 많자 조정에서 궁시(弓矢)를 잡을 줄 안 사람은 모두 보내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으므로 공 또한 함께 북방으로 가게 됐다.

함흥(咸興)에 이르니 감사가 공의 문재(文才)를 아껴 막하에 두었는데, 그때부터 문예에 더욱 힘써 과장(科場)에 나가 향시(鄕試)에 장원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문명(文名)이 더욱 드러났고 마침내 무과에 높은 등제(登第)로 합격해 월송 만호(越松萬戶)가 되고 이어 선전관에 천거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쪽에서 변보(邊報)가 있자 조정에서 해남(海南)은 적이 침입하는 요충(要衝)이라 하여 공에게 현감을 초수(超授)하였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이 경내(境內)에 침입했다. 고을 안의 난민(亂民)들이 때를 타서 자물쇠를 부수고 관물(官物)을 약탈해 가므로 공이 붙잡아 참수하여 머리를 거리에 내걸으니 경내가 두려워하여 감히 동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적선(賊船)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므로 공이 그들의 빈틈을 타서 곧장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해 그곳을 점거했다. 이후 상소하기를 "곧장 대량(大梁, 위(魏)나라의 수도)으로 달려간 것은 손빈(孫, 전국 시대 제(齊)나라 명장)의 승산이요, 먼저 범양(范陽, 안녹산(安祿山)이 발병(發兵)을 취한 것은 이필(李泌, 당 숙종(唐肅宗) 때 명신)의 기모(奇謀)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

그때 모부인(母夫人)이 서울에 있으면서 피란하였는데, 공이 서찰을 써서 두 아우에게 부쳐 보내어 모부인과 영결(永訣)을 하였던 말뜻이 비장하였다. 특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손톱과 머리칼을 베어 보내면서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이것으로 장사를 지내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공은 부하들을 단속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으나 사졸들을 어루만지기를 너그럽게 하고 항상 의기(義氣)로써 격려하였으므로, 군졸들은 감히 발을 돌리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적 열세에도 불구 대양중(大洋中)에서 적선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공은 국가를 회복하려면 전적으로 호서(湖西)에 의지해야 하는데, 큰 적도들이 바야흐로 금산(錦山)을 점거하여 호시 탐탐(虎視耽耽) 호서를 엿보고 있으므로 먼저 이 적을 토멸하여야만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이해 8월에 금산으로 달려가서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과 의리로 결탁하여 동맹하고 곰재[態峙]에 목책(木柵)을 설치한 다음 적과 크게 싸워 죽이고 노획한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침 날은 어두워지고 화살은 떨어졌으며 외원(外援)도 없었는데, 적이 이 기미를 알고 병력을 합하여 다급하게 몰아치자 공은 단병(短兵)을 가지고 접전하다가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크게 무덤을 짓고 푯말을 세워 기록하기를 "조선국의 충간(忠肝) 의담(義膽)"이라 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이르기를 "적의 정예 부대는 이 싸움에서 모두 죽었으므로 전라(全羅) 한 도가 힘입어서 보전되어 중흥의 기틀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 일은 삼강록(三綱錄)에도 실려 있다.

그 뒤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상언(上言)하기를 "국가의 포전(褒典)은 불가불 급급히 거행되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유극량(劉克良), 변모(邊某, 변응정) 등은 모두 충의가 특출한 사람들입니다. 의당 잘 추심하여 그 처자를 구휼하고 저 충혼(忠魂)을 위로함으로써 사기(士氣)를 북돋우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했다.

이후 임금이 공을 병조 참판에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했다고 전해진다. 변응정 사당은 원래 원주변씨 종갓집 뒤편 야산에 있었는데, 지난 2009년 연기군의 지원을 받아 국사봉 산 아랫자락에 재건립되었다. 끝.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