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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이성계와 함께 천하를 호령했던‘변안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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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이성계와 함께 천하를 호령했던‘변안렬’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9.30 14: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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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야기 | 원주변씨

고려 말, 변절의 역사 속에서 빛난 충의(忠義)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은 고려 말의 무신으로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이며 본래 심양(瀋陽)사람으로 전해진다.

변안렬 장군 묘역 전경


원주 변씨 족보와 문헌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말에 고려 황주(黃州)에 귀화한 변요의 아들 변여(邊呂)가 태천백에 봉해졌다. 그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 변순(邊順)은 서기 1268년(원종9) 사신 탈타아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심양의 장수로 있다가 심양후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변양(邊諒)이 이를 계승하였다.

대은 변안렬 장군 묘역


변안렬(邊安烈, 1334~1390)은 변양의 둘째 아들로 원나라의 원수(元帥, 군대를 통솔하던 주장)로 있다가 노국공주를 배행하여(심양에 있던 공민왕을 호종하여 왔다는 설도 있음-편집자) 귀국하였으며 서기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시켜 이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 고려 때 소부감의 3품 벼슬)에 올랐고, 이듬해 경도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고려 때 밀직사의 종2품)가 되었다.

1376년(우왕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으로 이성계, 유실 등과 함께 운봉, 부령 등지에서 왜구를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공민왕이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노력으로 기존의 첨의찬성사를 고친 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다.

그는 한방언과 함께 단양과 안동에 침입해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 삼사의 으뜸벼슬로 재신이 겸임함)에 이르렀으나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을 복위 시키려다가 김저와 함께 죽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1380년(우왕 6) 충남 서천과 전라도 남원 구례 쪽으로 왜구들이 대거 침입해 들어왔을 때를 역사의 기록에는 황산대첩으로 불리는데 당시 변안렬 장군은 양광, 전라, 경상 3도를 관장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1품)였고 휘하의 이성계가 3도 순찰사(정2품)였다.

그해 9월 운봉 월인역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변안렬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개선하자 임금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정승) 최영으로 하여금 천수문(天壽門, 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게 하고 백관들을 도열시켜 장군을 맞도록 했다. 그때 변안렬은 이성계와 함께 금 50냥을 상으로 받았다.

부원수가 되어 최영과 함께 제주를 평정한 뒤 지문하부사, 문하평리(종2품)가 되었으며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에 책록되었고 전라도 도지휘사 겸 조전원수로 있을 때 나세, 조사민, 유실과 함께 부령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쳐 문하찬성사(정2품)로 승진되었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 등 3도 체찰사가 되어 도순찰사 이성계와 함께 운봉과 횡산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친 뒤 정방제주가 되었으며 단양과 안동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 원천부원군에 봉해졌고 판삼서사, 영삼사사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 등이 이성계 제거와 우왕 복귀를 모의한 일에 연루되어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그가 한양 유배소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읊었다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내가 고려에 거주한 지 40년 정충직절을 홀로 펴기 구하였노라 / 화산의 인월역에서 개가를 전하고 위화도 탐라에서 의로운 깃발 올렸노라 / 새 임금을 대대로 모시어 하늘의 은총 오래되니 훈공 1등에 명망이 새롭구나 / 어찌하여 아직도 중흥을 생각치 않으니 누가 본 떠 따르겠는가"

그의 일편단심 우국충정을 표하고 있어 높은 기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한 정몽주의 ‘단심가’와 더불어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전해오는 ‘불굴가’가 그의 시로 밝혀졌다. 변안렬의 묘는 경기도 진건읍 용정리에 있으며 그의 신도비 이수에는 일월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불굴가(不屈歌)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마구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켜지고 쓰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 뉘라서 굽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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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byon 2018-05-25 03:03:50
자랑 스러운 충혼.
사나이의 기상이 아닌가.
문을 추양하는 이씨 조선 정책에 밀려 장군의 불굴가 가 단심가에 밀렸지만
후손으로 자랑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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