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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기적 구조로서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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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기적 구조로서의 우주’
  • 정승태(침례신학대 종교철학)
  • 승인 2013.09.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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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

21세기 북미철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논의되는 철학은 실용주의 철학과 함께 과정철학이다. 과정적 사고는 헬라클레이토스에서 시작하여 베르그송과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적 분야에서 언급되었지만 집대성된 건 하버드대학의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에 의해서다.

한마디로 과정철학의 우주론은 ‘유기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유기적 관계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모든 사물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것에 의해 의존적이고 연결되어 있다. 한 사물은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물은 한 사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는 우주가 ‘존재’(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ing)이기 때문이다.
과정철학의 기본 명제는 이렇다. 현실적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면 과정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명시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은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변한다는 것이다. 변화는 과정의 다른 이름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으로서의 사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이든 불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과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지나간다. 우리의 명예, 부귀, 권력 등, 이 세계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획득하고 얻는 것들이 무상하거나 덧없다.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정 속에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허무주의에 인생을 내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있다가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허무성이나 무상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사상은 그런 허무성과 무상성에 저항한다. 모든 것이 있다가 사라지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정적 사고의 매력은 삶의 과정을 통해서 겸손함을 배우게 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우주는 느낌의 주체다. 이는 우주가 미적 느낌의 우주라는 의미다. 우주 속에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느낌에 따라서 살아가는 가치의 존재다. 느낌은 의식이나 감각의 단계에서 구성되는 경험이다. 그것은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동적 존재를 전제로 한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은 느낌의 주체로서 의식을 통해서 또는 정신을 통해서 우주 속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의 느낌을 받아들이고 향유한다. 그 느낌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은 저마다 느끼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신학이나 교의적 신학이 지배적인 신학에 미적 신학이 더해짐으로써 신학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과정철학을 집대성한 화이트헤드는 누군가. 그는 1861년 2월 15일 영국의 동남단에 위치한 켄트 주(Kent)의 람스게이트(Ramsgate)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편이었고,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읽기와 쓰기를 배우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퀘이커교파의 후예로 성장했다. 퀘이커주의자였던 할아버지 토마스 화이트헤드는 람스게이트의 사립학교 교장이었고, 알프레드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후임으로 교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1960년 엥글리컨 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목사로서의 아버지는 구약성경에 심취해 있었고, 특히 예언자적 삶을 좋아했다. 화이트헤드의 아버지는 마치 예언자적 부르짖음과 같은 목소리로 설교했다고 한다. 추측컨대 우리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종교적이고도 교육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전통적인 가정의 교육에서처럼 화이트헤드는 14세 때인 1941년 창립된 셔본 중학교에 입학해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워즈월리와 셸리의 시를 즐겨 읽었다. 19세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순수 수학, 응용 수학, 물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철학, 문학, 역사, 종교 예술 분야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가 "과학과 휴머니즘에 대한 따뜻한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육방식은 친구들 사이의 플라톤적 자유토론이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잠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다. 이 시기에 18세의 어린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시험을 치러 와 처음 그와 대면했다. 화이트헤드는 러셀의 입학시험을 감독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러셀은 화이트헤드로부터 수리 기호학을 배우게 된다. 1910년에 화이트헤드는 25년 동안 수학을 가르친 케임브리지에서 13년 동안 가르칠 런던대학으로 교수자리를 옮겼다. 런던대학에 재직할 당시에 그는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 제1권을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은 7년간이란 오랜 시간을 걸쳐 만들어진 노력의 결정체였다.

과정철학을 집대성한 시기는 1924년 화이트헤드가 런던 대학을 정년퇴임할 즈음이었다. 그는 정년퇴임을 눈앞에 두고 하버드대학교의 철학부로부터 초빙되어 처음으로 매사추세츠의 시대, 즉 과정철학의 사상적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때의 나이가 63세였다. 하버드대학교의 철학교수로 부임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저술활동을 더 많이 기대했고, 강의시간을 줄였다. 하지만 그는 양쪽을 모두 택했다고 한다. 강의는 일주일에 세 번을 했고, 학생들에게 20분씩 토론 시간을 주는 대신, 오후 시간 전부 아니면 저녁 시간 전부를 학생들을 위해 할애했다.

젊은 사람들의 힘은 토론이고, 그들과의 정신적인 접촉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모른다. 버트란트 러셀이 스승 화이트헤드를 기억하기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교사"라고 말한 것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매 주 한번 자신의 집에서 저녁모임을 주도했는데, 초콜릿 음료와 케이크 정도를 나누면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책 없는 대화의 효능’을 믿었다. 대화란 마치 음악과 같다. 연주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다. 대화란 독단을 기피하는 특성을 갖는다. 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독단을 피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그것이 대화가 갖는 매력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아마도 ‘독단적 궁극성의 오류’(the fallacy of dogmatic finality)를 반대했는지 모른다. 독단은 좋은 토론을 방해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크로체, 베르그송 다음에 그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937년 화이트헤드는 13년 간 몸담은 정든 하버드 대학교를 떠난다. 화이트헤드는 10년 뒤 1947년 87세의 나이로 12월 30일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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