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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그때 조말생을 사형시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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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그때 조말생을 사형시켰다면…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8.19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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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야기 | 세종시와 인연 깊은 양주조씨

조선 문벌 양주조씨, 그 번성의 기원

조말생 초상

양주조씨(楊州趙氏)의 근원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인데 선계(先系)는 실전되어 상고 할 길이 없다. 시조(始祖)인 조잠(趙岑)은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中樞院)의 정2품 관직)를 증직 받은 판원사공(判院事公)인데 조지말(趙之末)의 후손으로 군우(君佑)의 손자 경질(景質)의 아들이라는 설(說)이 전해지고 있다.

양주조씨는 판원사공 1세조 조잠과 2세조 호판공 조인필(仁弼) 3세조 서운관정공(書雲觀正公) 조의(誼)로 3대에 이르기까지는 독신으로 선계(先系)가 이어 왔다. 다만 서운관정공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정평공(靖平公) 조계생(趙啓生)이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강화공(江華公) 조유중(趙惟中)이 강화부사, 불가(佛家)로 귀의한 조설우대사(趙雪牛大師),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이 영중추원사 예문관 대제학, 제학공(提學公) 조종생(趙從生)이 병조참판 제학을 지냈다.

특히 5형제 중 문강공 말생(末生)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해 양주조씨 중 다수의 후손인구를 이루고 있다.

조말생(1370~1447)은 태종의 총신으로 1401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을 거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정1품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며 승승장구하던 조말생은 1426년(세종 8년)에 장죄(臟罪, 벼슬아치가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관유물을 사사로이 취하고, 직권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죄)로 연좌되어 좌천됐다.

조말생 신도비
조말생 신도비

사기범 뒤를 봐 주고 뇌물로 노비 24명을 받은 죄였다. 당시 법률체계인 대명률로 보면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빗발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조말생을 사형시키지 않고 유배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일부 사가들은 이 대목에 대해 "세종이 북방 오랑캐의 잦은 도발에 대한 응징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조말생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를 구명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편집자)

실제 세종은 1432년 조말생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다음해에 함길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로 임명했다. 1434년 9월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나라의 명령을 하달하며 궁궐을 호위하며 군사 관계의 기무를 맡은 관청인 중추원의 종2품의 관직)가 되고, 1435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정2품)가 되었으며, 대제학(大提學,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냈다.

조말생 묘 표지석
조말생 묘 표지석


그리고 1438년에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궤장(杖, 팔뚝을 기대는 안석(案席) 역할의 받침상인 궤()와 지팡이인 장(杖)으로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나이가 많아지면 천자(天子)가 이 두 가지 물건을 내려 우대했음)을 하사받았다.

1442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 1품 품계)가 되었으며 1446년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정1품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태종의 서녀(庶女, 첩의 딸)인 정정옹주(貞靜翁主)와 혼인하여 왕실의 부마(駙馬, 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의 줄임말)로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진 조선(趙璿)이다.

정정옹주(貞靜翁主, 미상∼1455년)는 태종의 서녀로 어머니는 신빈신씨(信嬪辛氏)이다.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 하가하였다. 조선(趙璿)은 아들 조영과 1녀가 있는데,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정옹주(貞靜翁主) 능원은 경기도 양주시 장리에 있다.

양주조씨는 조선조에서 문과(文科, 대과) 급제 97인, 무과급제 71인, 생원진사 244인, 상신(相臣,정1품 정승) 8인,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대제학 5인, 인조장열왕후(仁祖莊烈王后)를 배출하고, 국구(왕의 장인) 1인, 의빈 2인, 청백리 1인, 충절 13인, 효열 32인, 재상급 26인을 비롯하여 1000여명의 관료가 나온 조선시대를 통하여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 이름을 얻은 가문이다.

특히 1905년 대한제국 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반대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순국한 원임의정대신 충정공(忠正公) 조병세(趙秉世)선생은 양주조문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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