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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순국선열, 현대사 정치거목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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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순국선열, 현대사 정치거목 배출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6.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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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와 인연 깊은 전의 이씨

이응로 화백·이시종 충북지사 등 유명인사 많아

▲ 이한응 열사가 자신의 형님에게 보낸 유서의 전문.


근대사 최초의 순국선열인 이한응(李漢應)은 대표적인 전의이씨 후손이다. 이한응은 1874년 10월 30일 용인 이동면 화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다.

그는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주사와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이후 이한응은 냉혹한 국제관계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전 단계로 당시의 세계 제1의 강국인 영국의 양해와 협조로 가능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영국과 두 번에 걸쳐 영일 동맹을 맺었다.1902년의 제1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의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 간섭하는데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1904년의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의 정치상, 경제상, 군사상 보호 지휘 감리할 수 있는 권리를 확실히 부여한다. 영국이 도와줄 것이니 일본은 마음 놓고 러시아를 쳐도 좋다는 거래였다.

국권박탈, 자결로 맞선 이한응

▲ 이한응 열사

이한응은 1904년 서리공사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뒤이어 외국인 고문에 관한 협정을 맺어 청나라와 미국, 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이에 이한응은 일제에게 국권이 박탈되는 것에 통분해 이를 항의하고 런던의 각국 공사들에게 한·일 관계와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현실은 이미 한국의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고 이한응의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영 외교의 일선에 있었던 이한응 열사는 영국 정부에 항의 하며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외교관 한 사람의 우국충정만으로는 꺼져가는 국운을 바로 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일제의 국권 박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국민과 조정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190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등 국내 민족 언론 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야기하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1905년 9월 5일 이한응의 시신이 국내로 돌아왔으며 그의 자결에 영향을 받은 민영환, 조병세도 국권박탈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뒤이어 자결하기에 이른다. 이한응 열사의 충절은 1907년 이준 열사,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 고종 황제의 뜻으로 열사의 유해를 영국으로부터 용인 덕성리에 모시고 장충단에 배향하였다. 순국선열 중에서 장충단에 제일 먼저 이한응 열사의 기념비를 세우며 열사를 소중히 기렸지만 이한응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1962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이한응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철승·이기형·이문세 등

▲ 주영 한국대리공사 이한응이 영국 외무성에 보낸 친필 공문. 국권 보장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전의이씨 현대사 인물 중 한 명인 이철승(李哲承)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보다 먼저 신민당대표최고위원을 지낸 정치계의 거목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는 반일 학생운동과 학도병 거부 등으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광복 직후에는 우익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김구, 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자유당에 반대해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3대, 4대, 5대, 8대, 9대, 10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5.16 이후에는 반군정운동을 이끌었다. 1970년대에는 김영삼·김대중과 신민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중도화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우익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이시종(李始鍾)은 정치인이자 민선 5기 충청북도 지사다. 충주시장을 4차례 역임했고 충주시 국회의원을 지냈다. 충주시장 출마 당시에는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았고 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했으나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각각 충주시 국회의원과 충북지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외에도 근현대 인물로는 이응로 화백과 이현세 화백이 전의이씨를 빛냈다. 정관계에서는 전 지식경제부 장관 이윤호, 전 국방부 장관 이상희, 국회의원 이종근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한글학자 이극로, 학술원 회원 이희승 등이 있고, 경제인으로 인터파크 회장인 이기형, 충남방적 회장 이종성, 연예인으로는 가수 이문세, 탤런트 이원종, 이정웅, 개그우먼 이경실 등이 있다.

전의이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정1품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정승) 5명, 대제학(大提學: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문형)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으며, 8명의 장원급제자와 문과 188명, 무과 44명, 사마시 433명 등 66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85년에 2만 6970가구 11만 2088명이었던 전의 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 1071가구 13만 3237명으로 조사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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