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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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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05.06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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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리고 사람살림 | 우리가 함께하는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지 벌써 17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스님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스님들은 어쩌면 이름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외어야 하는 역사 과목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 출연자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역사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예사롭다. 그 의미를 따지기에는 우리네 삶이 너무 많이 쫓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먼 옛날에 살았던 스님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때로 너무 멀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역사책에 나오지도 않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는 스님이 있다. 합천의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에 오래 동안 주석하셨기에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성철 스님이다. 80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이 되셨는데, 그때부터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면 ‘법어(法語)’를 발표하셨다. 가톨릭으로 말하자면 교황의 성탄절 메시지 쯤 되는 내용이다. 성철 스님의 그런 메시지 중에 1986년에 초파일에 발표한 ‘생신을 축하합니다’라는 제목의 법어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바위 되어 우뚝 서 있는 한가로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 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초파일 곧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추어 발표한 메시지이니, 부처님의 생신을 축하한다는 의미는 당연한 것일 터.
그런데 거기 등장하는 부처님들이 좀 이상하다. 교도소에 있는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물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만나는 이들마다 다 부처님이라 부르고, 부처님이라 불렀으니 생신을 축하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 법어를 처음 접했던 이들은 어리둥절해 했던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뜬금없이 부처님이라 불린 이들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아마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절을 하고는 "내가 당신들을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보살도를 수행하여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던 보살이다.
성철 스님께서 하셨던 법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법어의 핵심은 이렇다.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귀하게 여겨져야 할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동아시아라고 부르는 문화권의 역사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불교 전파의 경로를 따라서 한문과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의 천 년이 흘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일한 불교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양상은 전혀 달랐다. 저마다의 토양이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를 기준으로 말할 때, 이웃 일본은 <법화경>의 나라라고 불리고, 우리나라는 <화엄경>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 <화엄경> 중에서도 우리 선조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은 ‘보현행원품’이라는 부분이다. 다음은 그 ‘보현행원품’의 일부분이다.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일체 세계 일체 국토에 계시는 티끌 같은 먼지의 숫자만큼 많은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혹은 보살의 몸으로 나타나시고, 혹은 부모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혹은 형제나 착한 이웃으로 나타나시고, 혹은 거친 이웃이나 대립하는 이웃으로 나타나시는 자비하신 부처님께 빠짐없이 예경하겠습니다. 아무리 모나게 나를 대하고, 아무리 억울하고, 다시 나에게 어려운 일을 몰고 오더라도 거기에서 자비하신 부처님을 보겠습니다."


불교도들에게 부처님은 참으로 존경받아야 할 스승이고, 그 모습과 행동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사표이다. 그런 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이 부분의 핵심이다. 혹은 보살의 몸으로, 혹은 부모님의 모습으로, 혹은 아들딸의 모습으로, 혹은 형제의 모습으로, 혹은 착한 이웃으로, 혹은 거칠고 미운 이웃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오던, 설령 그 모습이 나에게 억울함을 느끼게 하고, 나를 모질게 대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예배하고 공경을 표하겠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말씀이든,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의 말씀이든, ‘보현행원품’ 보현보살의 다짐이든 어느 것이나 맥락은 동일하다.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귀하게 여겨져야 할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요즘 아이들이 제일 듣고 싶어 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 제일 듣기 싫은 말이기도 한 것이 있다. 이른바 ‘엄친아’이다. ‘엄마친구의 아들’이란 말이다. 너무도 잘난 누구누구와 그렇지 못한 우리 아이들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나도 저런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말이고, 왜 꼭 나하고 비교하느냐며 신경질적인 투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꼭 ‘엄친아’뿐일까?
"누구네 남편은 이렇게 저렇게 해주었다는데"라는 말을 듣는 남편은 슬프다. "누구네 아내처럼, 몸매며 옷차림 좀 신경 쓰라."는 말을 듣는 아내는 슬프다. "누구네 부모는 유산도 많이 물려줬다는데"라는 말을 듣는 늙은 부모님은 죽고만 싶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 고마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꼭 그들에게 없는 것만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고마움은 왜 자꾸만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집에 돌아가면, 제발 우리도 한번쯤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절을 해보자. 그리고 말하자.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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