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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그 설렘과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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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그 설렘과 떨림
  • 박종훈(대전성모병원 원목실장)
  • 승인 2013.04.15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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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하고 여섯이 되시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어린 시절, 아니 중년에 이르기까지 달리기를 무척이나 잘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 당신의 말씀을 들어보면, 초등학생 시절, 학교 운동회의 각종 달리기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건 어디까지나 할머니 당신의 증언이라서 신빙성이 많이 결여된다고 여기시는 분이 계시리라 사려 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모님들의 증언을 덧붙입니다. 할머니는 스무 살에 할아버지와 혼인하여 팔남매를 낳으셨는데, 장남이신 아버지와 막내 작은 아버지와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입니다. 그러니까 막내 작은 아버지를 낳으셨을 때는 이미 중년에 이르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고모님이나 작은 아버지들이 무언가를 잘못하고 어머니의 손을 피할 세라 달아나려고 시도를 하면, 마당을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결국 붙잡히셨다고 합니다.
팔남매를 낳고 키워낸 중년의 아주머니가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들·딸 보다 달리기가 빨랐다고 하면 할머니의 달리기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되시리라 여겨집니다.
1985년 가을 어느 화창한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가을 운동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당신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손주가 얼마나 빨리 바람을 가르고 질주 할 것인가를 무척이나 고대하시며 운동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차례에 따라, 1학년 어린이 달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출발선, 그것도 제가 제일 잘 보일만한 곳에서 "잘 뛰어라"며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바로 앞에서 친구들이 달릴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출발선에 서게 되자 쿵쾅거리는 심장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제 자리에." "차렷." "탕!" 소리와 함께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뛰었던 친구들이 다들 너무나 잘 뛰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뛰는 내내 저는 친구들의 등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결과가 쉽게 예상되시겠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까스로 꼴찌를 면했다는 겁니다.
저녁 식사 시간, 운동회 결과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가족들의 질문에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종훈이는 옆으로 뛰어 가더라." "……" 할머니의 말씀에 가족들 모두 말문이 막혔나 봅니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 한 건 작은 삼촌이었습니다. "너, 게냐? 왜 옆으로 뛰어? 하하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손주가 그리도 못 뛰는 모습을 보셨으니 실망스러우실 법도 할 텐데 할머니는 이듬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손주를 응원하기 위해 매번 운동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달리기 실력은 그리 향상되지 않았고, 미션 달리기나 장애물 달리기처럼 변수가 작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위에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초라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는 저에게 포근하고 따스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 뛰어서가 아닙니다. 할머니의 기대와 응원을 한 몸에 받는다는 기쁨과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설렘과 떨림이 출발선에 설 때마다 매번 제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됐든, 일이 됐든, 아니면 누군가와의 만남이 됐든,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그 시점에는 큰 기대를 품고 아낌없이 응원을 보내는 누군가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이기도 하고, 부모님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고,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첫발이지만, 나를 위해서 응원해주고, 지켜봐 주고, 기도해 주는 그 누군가가 함께 있음을 기억한다면, 설렘과 떨림으로 그리고 지치지 않고 끝까지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나만을 응원하는 누군가가 함께 있음을 기억하며, 설렘과 떨림으로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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