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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세요? 귀 기울여야 비로소 보이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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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세요? 귀 기울여야 비로소 보이는 그림
  • 정은영(한남대 예술문화학과)
  • 승인 2013.03.22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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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낭 크노프, <슈만을 들으며>, 1883. 캔버스에 유채, 101.5 x 116.5 cm.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여인은 몹시 슬픈 모양이다. 의자에 앉아 있지만 편히 쉬고 있는 자세가 아니다. 이마를 짚은 손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무언지 복받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힘들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다. 누군가와 이제 막 이별을 한 것일까. 혹시 소중한 사람과 영영 사별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모든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 어떤 이는 이 그림에서 골치 아픈 일로 인해 두통을 앓고 있는 심약한 노부인이 보인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속 썩이는 아이들 때문에 화가 난 가정교사가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는 것이라 장담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도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동일한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울적한 기분에서 보면 외롭고 우울한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휴식이 그리운 상태에서 보면 잠시 졸며 쉬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놀랍게도 이 그림 속의 여인은 음악을 듣고 있는 중이다.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소장된 페르낭드 크노프(Fernand Khnopff)의 1883년 작품 <슈만을 들으며>이다. 그림 속의 여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슈만의 음악을 듣고 있는 크노프의 어머니라고 한다. 주의 깊게 보면 그림의 왼편 구석에 검은 피아노와 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연주자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는 지금 슈만의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말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시와 음악과 그림을 함께 즐기며 시를 음악으로,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특히 회화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가시적인 형태나 색채로 담아내는 상징주의 미술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던 시기였다. 소리를 그림으로 옮겨 놓겠다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지만, 크노프는 음악을 직접 들려주는 것 못지않게 풍부한 여운을 남기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런데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방식이 사뭇 독특하다. 음악을 듣고 있는 여인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얼굴을 가림으로써 상상의 눈으로 보고 감성의 귀로 듣도록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골치가 아프거나 졸려서가 아니라 실내에 퍼지는 피아노의 선율 때문에 내적인 동요가 일어난 상태를 보는 이 스스로 상상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흔히 슈만의 피아노곡은 맑고 투명한 서정에서부터 환상적인 몽환의 상태, 깊은 번뇌나 격렬한 고통에 이르기까지 그 감정의 진폭이 넓어 낭만주의 음악의 결정체라고들 한다. 섬세한 발라드일까, 꿈같은 환상곡일까, 열정적인 즉흥곡일까. 여인이 듣고 있는 음악을 상상하며 그림을 보는 우리는 어느새 상상의 귀를 기울이게 된다.

세기말의 상징주의자들처럼 청각적인 감각을 시각적인 회화로 표현하려고 했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결국 추상회화를 탄생시킨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는 크노프보다 더 많은 상상을 요구한다. 크노프가 여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제 칸딘스키는 색과 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칸딘스키의 <즉흥>을 보며 우리는 온전히 색을 들어야 한다.

▲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28>, 1912. 캔버스에 유채, 111.4 x 162.1 cm.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우리는 상상력을 사용하여 듣는다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더구나 그림을 보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그야말로 낯설기 짝이 없다. 상상의 여지가 없는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색을 보고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상상력이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고화질 화면과 고품질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인해 우리의 눈과 귀는 오히려 무뎌져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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