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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산책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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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산책의 즐거움
  • 정은영(한남대 에술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13.02.28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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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산책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다. 꽃 피는 봄날이나 낙엽 지는 가을이 아니라 우중충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 날 산책을 나서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런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가 자랑하는 소장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구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의 작품에 그려진 파리지앵들. 그들은 보슬비 내리는 도시의 거리를 한가롭게 거니는 산책 애호가들이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녀 한 쌍이 커다란 그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흑색 코트와 보우타이에 춤 높은 실크해트까지 갖춘 신사와 고급스런 암갈색의 드레스에 얇은 베일이 드리워진 모자로 멋을 낸 여인이다. 그들 뒤로 곧게 뻗은 교차로에는 홀로 사색에 잠겨 거닐거나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산책 중인 파리지앵들이 보인다. 모두들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걸 보니 뿌연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가랑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빗물에 젖은 도로가 촉촉하다.

이 그림이 완성된 1877년은 파리의 재개발이 끝난 직후였다.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은 오스망 남작이 파리 곳곳에 남아 있던 중세 도시의 흔적을 없애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적인 파리로 새롭게 단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곤 했을 흙길은 이제 깔끔하게 포장된 널찍한 대로가 되었다. 화면의 왼편을 차지하고 있는 규격화된 건물들 또한 이제 막 완공된 파리의 아파트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아는 도시 재개발이 그 시절에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중앙에 위치한 녹색의 가로등 저 뒤로 아파트 공사를 위해 설치했던 가설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림에 그려진 실제 장소가 튀랭 가와 모스코 가의 교차로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 젊은 커플은 파리의 명소 생라자르 기차역을 보고 있을 것이라 한다. 카유보트의 동료 화가였던 모네의 그림으로 유명한 생라자르 역은 언제든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근대적인 삶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규격화된 잿빛 우산 역시 당시에는 세련된 도시의 삶과 연결된 물건이었다 한다. 이렇게 건물과 도로, 패션과 소품에 이르기까지 카유보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임을 자부하던 파리의 모습을 상징적이면서도 명료하게 기록해 놓았다.

새롭게 재탄생한 도시를 걸으며 그들이 느꼈던 감흥은 어떠했을까. 지금 우리에겐 역사의 향기가 느껴지는 옛 도시의 모습이지만 그림 속 그들에겐 분명 새롭고 낯선 풍경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변화무쌍한 삶의 속도감이 적잖이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산책자들의 파리 사랑이다. 비 내리는 거리를 산책하는 이들도, 그런 모습을 사진의 한 컷처럼 포착한 화가도, 변화를 대하는 그 시선에 지적인 호기심과 잔잔한 애정을 담고 있다. 시인 보들레르는 도시의 이런 산책자를 ‘플라뇌르(flâneur)’라 칭하며 찬양했었다. 흔히 만보자(漫步者)로 번역되는 플라뇌르는 근대화된 파리를 한가롭게 소요하며 변화하는 현재를 만끽하던 도심의 탐험가들이었다.

삶의 속도가 가속화될수록 발걸음은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하는 법. 19세기 파리의 만보자처럼 오늘 하루 조금만이라도 행보를 늦추어 천천히 걸어보면 어떨까. 아마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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