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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빨리 통일시켜주고 떠나겠다”는 기회 살리지 못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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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빨리 통일시켜주고 떠나겠다”는 기회 살리지 못한 우리
  • 이계홍
  • 승인 2021.07.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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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미국,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3)
1945년 9월 9일 한국에 들어온 미군이 조선총독부(옛 중앙청) 건물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1945년 9월 9일 한국에 들어온 미군이 조선총독부(옛 중앙청) 건물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세종포스트 이계홍주필]미군이 한국의 실정을 알지 못한 단적인 사례가 있다. 한국점령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1945년 9월 8일 인천 상륙하면서 치안 유지하던 일본 경찰이 한국 청년 2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여러 명이 부상당한 것을 두고 “조선 국민들이 근접 불가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 중장은 9월 11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치안 당국(일본 경찰)에게 민간인 접근금지를 명령했다. 그들이 미군 입국(landing) 작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무기 소지를 허락해야 했다. 왜냐하면 질서 유지가 우리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군은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관점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점령 초기 남북을 가능한 빠른 시기 통일시켜주고 발을 빼려고 했다. 초기엔 선의였다고 본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담에서 두 나라는 조선을 5년 정도 신탁 통치한 뒤 통일 정부를 세워주고 떠날 계획을 세웠다. 두 나라 모두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몰랐고, 경제 재건을 하려면 물적 덤터기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동방의 맨 구석지에 있는 가난한 식민지 신생국 조선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한국 독립에 관해서는 소련이 더 적극적이었다. 소련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 통일 정부를 만들어 독립시키자고 했고, 미국은 20-30년 신탁통치를 원했다. 당시 조선 반도는 사회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서둘러 독립 정부를 세워도 나쁠 것이 없었다. 결국 조정 끝에 5년 신탁통치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가 엉뚱하게 신탁통치안을 반대로 보도한 바람에 국내 정정이 복잡하게 얼크러졌다. 미국이 즉각 독립시키자고 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연장하자고 했다고 반대로 오보를 내면서 좌우익 간에 찬·반탁 시위 회오리에 휩싸였다. 찬반탁 문제는 미소 양대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한 사회를 이념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오스트리아의 사례

신탁통치 상황은 서방의 오스트리아에도 적용되었다. 나치 전범 국가인 오스트리아(히틀러의 모국)는 독일과 함께 서방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점령국이 제시한 10년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여 1955년 10년 만에 마침내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적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 통일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5년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마자 격렬한 찬반 시위에 휘말렸다. 김구 우파들이 “일제에 이어 또다시 식민지냐”며 대대적 시위를 벌였고, 이승만도 가세했다. 민족주의 관점으로 보면 일제 식민지를 겪은 당시의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적 능력과 냉엄한 국제 질서를 살펴볼 때, 그것이 과연 옳은 판단이었느냐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에게는 뼈아픈 대목인 것이다.

이때 국내 정치는 암살과 테러가 일상화되었다. 송진우, 여운형, 김구, 장덕수 등 정치 거목들이 차례로 희생되었다. 공산주의 세력도 발호했지만, 이런 암살은 대부분 우익단체의 테러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치 거목들이 반목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소한 이익 때문에 거꾸러뜨렸다고 보아야 한다.

암살의 동기는 정치적 동기, 이념적 동기, 적대적 동기, 신앙적 동기, 개인적 동기 등이 있겠지만, 우리는 대개 정치폭력조직들의 작은 영웅 심리와 금전적 동기가 배경이었다. 즉 이들은 작은 이익 때문에 손쉽게 배후세력에게 이용당했다. 그만큼 건국의 청사진이 가볍고 초라했다. 소모품에 지나지 않은 테러리스트들의 만행으로 역사는 너무도 참담하게 굴절되었다.

미국은 애초에 극우 세력인 김구, 이승만을 배제하고, 또 박헌영 등 극좌 세력을 거부한 가운데 김규식 대통령, 여운형 부통령 체제로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 강경 세력의 격렬한 반대와 미국 내 정보팀의 의견 불일치와 판단 착오, 국방경비대 정보국 세력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극단의 길만 달리게 되었다. 국내 정치세력의 미숙성이 원인이다.

미국과 소련은 연합국이자 동맹국

1947년 2월 이전까지는 미소 양국은 연합국이자 동맹국이었다. 두 나라가 합심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긍심이 컸다. 그것이 한반도 38도선에서 그대로 입증되었다. 두 나라의 협력적인 모습은 한반도 38선 분할의 약속 이행에서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1945년 8월 7일 만주를 휩쓸고, 한반도로 진격해 함경북도 나진, 웅기, 청진을 점령했다(8월 9일). 소련군이 한반도에 재빨리 진격했던 것은 만주 관동군이 지리멸렬한 데다 한반도 국경선 밖 200km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3000km 바다 건너  태평양상의 오키나와 남쪽에 있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선을 그어준 대로 38선까지 내려와 멈춰서서 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미군은 그로부터 한달 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미24군단 병력의 일부)했다.

인천항에서 미군을 공식적으로 맞은 카운터 파트는 일본 경찰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일본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건준에 치안권을 위임했으나 미국과의 통신을 주고받은 뒤 이를 회수해 다시 국내 치안유지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우리의 해방의 감격은 유예되고, 조선총독부의 질서 유지가 계속되었다.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여전히 진행된 것이다.

미군이 인천상륙할 때, 일본 기마경찰이 질서를 잡고 미군을 맞았는데, 이때 환영 나온 인천 시민이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미군은 이를 보고받고 일본군에 고맙다고 치하의 말을 남겼다.

미군은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입경했으며, 다음날 38선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소련군을 찾아가 함께 전승의 팡파레를 울렸다. 만약 소련군이 미군과의 약속을 깨고 미리 부산과 목포까지 진격했다면 한반도 지도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련군은 미군이 그어준 38선에서 미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이날 서로 얼싸안은 것이다.

이토록 두 전승국은 맹방이었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 점령 초기 가능한 빠른 시일 내 철수하자고 약속했다. 그래서 소련군이 먼저 나간 뒤(1948년 12월), 미군도 다음 해인 1949년 7월 철수했다. 그것은 선의였던 것같다.

그런데 이 틈을 노려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해 그 1년 후 1950년 6.25 남침을 감행했다. 그래서 미군 철수가 6.25의 비극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음은 후일의 역사 평가에서 정설로 나온다. 

6.25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김일성은 조만식, 김두봉, 무정, 허가이, 박헌영 등 노 혁명가들로 인해 쪽을 쓰지 못했지만, 6.25를 계기로 북한 정권을 장악해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미군 철수와 남북협상의 실패는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았다.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과 ‘트루만 독트린’이 냉전의 시작점

미군은 초기 남한을 점령하면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이념과 사상이 자유롭다“며 이념 문제에 관한 한 관대했다. 이것이 남한 내부 갈등을 부추기고, 엄청난 희생을 강요시킨 원인이 되었다.

해방공간에서의 한반도는 사회주의가 대세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운 것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세력이었다(이때까지 아시아엔 민주주의가 발아하지 못했다). 이때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은 항일 투쟁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경계가 모호했다. 굳이 말하면 민족주의자가 사회주의자고, 사회주의자가 민족주의자였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이론 무장이 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혹은 군국주의) 반대 개념으로 차용해 쓴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의 처칠이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 건설을 보고 그 음흉 성을 풍자하는 ‘철의 장막(Iron Curtain) 뒤의 곰’이라고 비유하면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대결 양상을 구분 지었다. 미국은 놀란 나머지 1947년 2월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것이 동서 냉전의 서막이자 시작점이다.

한반도는 내부 갈등과 남북 대결이라는 두 가지 갈등 구조 속에 냉전의 실험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구 10,1 저항(폭동)-제주 4.3-여순사건-6.25 전쟁을 겪은 것이다. 내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냉전의 대리전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와 똑같이 분단되었던 오스트리아는 여러 가지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결집력을 강화해 4대국 신탁통치 10년만인 1955년 독립했다. 강대국이 그토록 통일을 꺼려했던 독일은 1989년 완전 재통일했다. 우리는 5년의 신탁통치안을 걷어차고, 극도의 내부 대립상과 남북 대결을 벌이며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과 소련은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해석상의 오해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양론이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진영 대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진영의 현재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서 규정짓고 있다. 미국의 도움으로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해방 공간의 미국의 역할은 선한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는 사대주의의 유전인자와 소소한 이익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현대사에 관한 한 거의 무지하다. 그것은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 현대사를 부정하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대신 냉전, 반공, 대결주의가 강제되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현대사 교육을 외면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현대사의 맹아가 되었다. “과거 타령해서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일제강점기 때의 공기를 마시고 산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며 현대사 자체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 문제는 정치계와 학계, 자본과 언론계, 종교계를 쥐어흔드는 기득권이 앞장섰다. 근래는 보수적 관점의 학자들이 친일과 맞물려서 현대사를 비틀고 있다. 미군정의 ‘점령군’과 한미협약의 ‘주둔군’ 지위조차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편의적으로 버물려 물타기 한다. 간단명료하게 정리될 것을 상황 논리 등 여러 가지 사족을 붙여서 역사적 사실을 굴절시킨다. 사악한 것일수록 사족이 장황하고 길다. 

여러 갈등 요소를 조율하고, 내부 역량을 키워 독립한 오스트리아와 내부 균열과 대립으로 기회를 살리지 못한 우리의 경우를 보면 때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우리는 왜 내부 역량을 결집시켜 화해의 길을 가지 못하는가. 상대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통합의 컨센서스를 형성할 기제가 그렇게도 빈약하단 말인가. 서로 설득하고, 꿈을 실어주는 협상의 스킬이 부족한 것인가. 왜 이렇게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로 공허한 싸움질만 하는 것인가.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가 그리도 힘겨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이런 폭력이 지난 70년 체제를 받쳐온 기둥이었다면 이제는 이성적 판단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도 되었다. 국민적 성숙도가 선진국보다 우위에 있지 않은가. 

역사학자 신채호가 말했듯이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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