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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일본의 관점으로 한반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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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일본의 관점으로 한반도를 보았다"
  • 이계홍
  • 승인 2021.07.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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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미국,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2)
1945년 8월 24일 함흥에 도착한 북한 점령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환영 군중을 바라보고 있다. ©위키백과사전

[세종포스트 이계홍주필]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 상륙하자마자 포고령 제1호에 이어 제2호를 발표하고,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들을 대거 미군정에 기용했다. 실무능력을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의 자문을 받은 조치였다. 

일본 정부의 자문이라는 것이, 일본의 대조선 통치의 관점으로서 조선은 무지몽매한 ‘미개한 민족’이라는 폄훼 위주였다. 하인처럼 부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시켰다. 미국은 수천 년의 독립국가인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했고, 조선이 일본에 핍박을 당한 역사적 사실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이렇게 일본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대한반도 관리 대책을 구상했다. 이런 현실 인식의 부족이 오류를 낳았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해방공간 모순의 가장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 반도의 능력 있는 세력은 일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친일파들이라고 조언했다.(실제로 친일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실무에 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미군정에 발탁된 그들은 행정, 사법, 검찰, 경찰, 군부, 재계, 학계, 교육계, 언론계를 장악해 사회적 주류라는 견고한 기득권의 성벽을 쌓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재명이 "대한민국이 친일청산을 못 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했다"고 한 발언도 그런 맥락에 나왔을 것이다.  

독립투사들을 체포하러 다닌 친일 경찰과 헌병이 해방 조국의 설계자로 나서서 군림하고 있었다면 나라가 물구나무섰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그 세력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완장 차고 다니면서 반대파를 빨갱이, 공산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일제 시기보다 더한 권력의 횡포였다. 특히 경찰과 사법부가 그랬다. 미군정은 이들 세력을 앞세워 대한반도 통치정책을 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 계열은 물론 사회주의 계열, 심지어 민족주의 세력까지 제거되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거대 담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디테일한 측면에서는 권력 기반을 이용해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고, 정치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당시 한반도 사정에 무지한 미군정은 이렇게 왜곡된 우리 역사의 방조자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국의 모든 공식 문건은 ‘점령군’이라 적혀 있다. 이것이 6.25 이후 ‘주둔군’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 후 전시작전권은 물론 군사적 주권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이 행사했다. 전시작전권 회수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지만 보수 정권은 계속 유예하고, 민주정권이 회수하려고 하면 군사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수 진영이 비판했다. 보수는 본래 민족주의, 군사주권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데, 한국의 보수만은 독특하게도 예외다. 


38선에서 약속 지킨 소련


일본 패망과 함께 한반도에 진출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한 달 앞서 1945년 8월 8~9일 함경북도 나진, 웅기, 청진에 입성했다. 이에 앞서 소련 제1방면군은 연해주 남단에서 소만(蘇滿) 국경을 넘어 동만주 지역의 요새들을 파괴한 후 지린(吉林)으로 들어왔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은 미국과 싸우기 위해 중국 남부와 인도지나반도, 남태평양 제도, 오키나와 등지로 빼돌려 만주는 사실상 진공상태였다. 이때 미국은 관동군의 위력이 막강하다고 오판해 소련의 참전을 절박하게 요청했다.

소련은 유럽에서 대독일 전쟁으로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우방국 미국의 간곡한 요청으로 만주 대일전 참전을 수락했다. 마침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전세는 급속도로 역전되었다. 소련은 이 여세를 몰아 맺었던 일소(日蘇) 불가침조약을 폐기하고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 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련 제1극동방면군 제25군은 선발부대를 한반도 북쪽 국경지대에 투입하였고, 8월 9일 기갑부대와 전투기를 출동시켜 나진, 웅기, 청진 일대를 장악했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34군 무장 해제를 단행하고, 함경도 행정권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함남지부에 넘겼다(8월 16일). 건준이 서울에서 해체되자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 기구를 접수했다. 한반도 북쪽에 들어온 소련군 제25군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다.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과 소련군


미소 두 나라 군대가 남한과 북한에 입성했지만 두 나라 모두 정교한 한반도 정책이 없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보다 한 달 늦게 인천에 상륙(1945년 9월 8일)한 데다 점령군사령관으로 온 하지 중장은 직업군인일 뿐, 정치적 식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는 도쿄에 본부를 둔 미군 총사령부(GHQ:General Headquarters:사령관 맥아더)의 지시를 받아 한반도 정책을 수행했으나 GHQ 자체가 일본의 자문을 받고 움직였으니 올바른 한반도 정책이 수행될 리 없었다. 편견과 차별 위주였다.  

승전국과 패전국 관계인데도 미국과 일본은 호혜적이고 우호적이었다.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는 고작 4년이지만, 우호 선린 관계는 100년이 넘고, 미국에는 수백만 명의 일본인이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중 미국의 서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새크라멘토, 로스앤젤레스는 일본인이 대부분 상권을 장악했다. 이들이 전부 로비스트라고 할 순 없지만, 모국 일본을 위해 헌신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맥아더의 대학 시절의 기숙사 룸메이트는 일본인 학생이었다. 여기에 미연합군 사령부에는 일본군 출신 장교가 수백 명이었다.(한국 출신은 10명 미만). 미일 간의 인적 인프라는 이렇게 폭넓게 짜여져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대미 창구는 거의 전무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애초에 일본과 한국을 보는 눈이 비대칭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헤쳐나갈 길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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