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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vs 반기득권' 투쟁, 이제는 끝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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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vs 반기득권' 투쟁, 이제는 끝낼 때
  • 이계홍
  • 승인 2020.12.29 08: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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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조선 17대 왕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 정쟁의 시작
서인과 남인 등 '복상' 기간 논쟁... 살육전까지 치달은 당파 싸움
검찰·언론·사법부·구정치·자본세력 등 현재의 권력 구조에 던지는 메시지는
검찰과 사법 개혁,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외치는 온라인 운동. 이 과정에서 기득권 vs 반기득권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사진=네티즌)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조선 17대 왕 효종이 북벌 등 나라를 리셋팅하려 했으나 즉위 10년만(1659년)에 죽었다.

왕은 종신제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정책을 세우는 계획에 따라 즉위 10년은 나라를 설계하는 초창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애석했고, 대신 엉뚱하게 나라의 심한 내출혈을 가져왔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겪은 병자호란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형님 소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씻고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북벌정책을 쓰면서 국운을 상승시킬 계획을 밀고 나갔다.

그런데 채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 조선왕조 '효종'의 죽음 그리고 '기득권' 당파 싸움의 서막

효종의 죽음을 두고 대비가 어떻게 복상을 치르느냐로 논쟁이 벌어졌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효종의 친모 인렬왕후가 죽자 14살의 조씨(장렬왕후:후에 자의대비)를 계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효종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나이 많은 아들 효종이 죽었으니 어머니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예법의 나라이자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조에서는 복상(服喪) 하나가 유무식을 따지는 기준이 되었다. 5세 연상의 아들이 죽었는데, 어머니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정은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 대부이자 서인계 노론당의 영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왕통(王統)으로는 적자(嫡子)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남(장남은 소현세자)이란 점에서 대비가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의 당수가 내린 결론이어서 조정은 쉽게 대비의 상복 기간을 1년으로 정했다.

그런데 남인 윤휴가 등장하더니 유교 예법인 ‘의례(儀禮)’를 들어 '제1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2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는 구절을 내세워 3년 복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동인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남인계 대표였다. 

송시열은 ‘의례’의 다른 구절에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 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다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들어 1년상을 못박았다. 이것이 서인 대 남인의 피를 부르는 대결을 가져왔다.

서로 파멸로 가는 ‘내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2차 예송전쟁이 벌어졌다. 송시열이 완판승을 거두었다고 하는 때에 우리에게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가 현종 시기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임금(효종)에게 있다고 하고, 적통(嫡統)은 장자(소현세자)에게 있다고 하는데, 종통과 적통이 어찌 두가지일 수 있나. 아버지의 명령과 왕명을 받았어도 적통이라 하지 못한다면 가짜 세자란 말인가, 가짜 임금이란 말인가. 엿같은 얘기 집어치우라”고 도전했다. 

그는 직설적이고 과격한 표현으로 “송시열이 효종을 적통이라 하지 않았으니 그 아들인 현종의 적통성을 문제삼은 것 아니냐”고 공격했다. 당권을 쥔 서인세력은 당장 윤선도를 국문하여 죽이자고 방방 뛰었다. 이때까지도 국정 주도 세력은 서인이었다. 

현종은 윤선도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쥐고 있던 서인에게 대응하지 못했고, 당시엔 나이도 10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현종은 “윤선도가 심술이 바르지 못해 음험한 상소를 올려 상하를 헐뜯었다”며 관직을 빼앗고 그의 고향인 해남으로 귀양보냈다.

서인들은 이 조치가 미약하다고 주장해 윤선도를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함경도의 오지 삼수(三水)로 귀양보냈다.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생모인 인선왕후가 죽었다. 그때까지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도 살아있었다.

이번엔 며느리가 죽었으니 시어머니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아무 물정 모른 대비가 오래 산 것도 죄인 듯, 그녀는 권력투쟁의 도구가 되었다. 

맏며느리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1년 상복을 입어야 하고, 둘째 며느리가 죽으면 9개월 기간의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조판서는 둘째 며느리라도 왕비이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서인들이 예법에 어긋난다며 9개월 복제를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에서 9개월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여러 사례를 들어 9개월 복제로 정한 것은 잘못이며, 1년 복상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혼선이 빚어지자 현종이 나섰다. 현종도 30대 중반으로 사리 분별력이 생긴 처지였다. 

현종은 서인들이 같은 상을 두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것에 화가 났다. 같은 국상인데 왜 복상을 정하는 기준이 다른가. 첫 번째 단추(1차 예송)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에 나온 오류라고 보고, 이러저러한 예법을 들이대며 설명하는 서인들을 내쳤다.  

현종은 “이전의 1차 예송은 참최복(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 2차 예송도 1년복으로 하라”고 명했다.

현종은 효종을 서자로 규정한 논리(體而不正)를 질책함으로써 자신의 왕통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해서 서인이 지고, 서인 세력은 붕괴된다. 송시열은 나중에 사약을 받고, 영의정 김수홍은 귀양을 가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2차 예송논쟁이 정리되자마자 현종이 죽고, 13세의 숙종이 조선 제19대 왕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당파 싸움이 하나의 악질 전통처럼, 못된 유행병처럼 조선왕조를 지배했다.  

숙종 시대는 조선 당쟁사의 최정점기였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수차례의 내부 정변이 있었고, 이때 논쟁의 주인공인 송시열과 윤휴, 허적 모두 숙종 재위기에 사약을 받은 것이다. 예송논쟁은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살육의 복수극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등장한 장희빈의 사사는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런 더러운 전통이 구한말까지 이어져 끝내 망국을 자초했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당쟁이 극심할수록 국력이 약화되고, 나라는 병들었다.

전쟁의 참화와 외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 일이 없더라도 나라는 극도로 병들었다. 효종 시기가 대표적이다. 끊임없는 가뭄과 홍수로 백성들이 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는 참혹한 대기근이 발생했다.

후에 기상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지구에 덮쳤고, 농사를 짓던 백성 수십만 명이 연 이태의 흉작으로 굶어죽었다. 2년에 걸친 이때의 기근을 역사적으로는 ‘경신(庚申) 대기근’이라고 한다.

이때 전염병마저 창궐해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백성들이 이렇게 신음하는데, 여전히 띵까띵까 호의호식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 사대부라는 지식인 계급이었다. 백성들이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시기에 지도층, 즉 사대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권력투쟁만을 일삼았다. 그것도 백성 살리는 일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한갓 왕실의 상가에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를 가지고 피터지게 싸웠다. 

3년이냐, 1년이냐, 9개월이냐. 상복을 1년 입으면 어떻고, 9개월 입으면 어떤가. 그것이 백성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골목마다 백성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데, 백성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논쟁으로 살육전을 벌이고 있으니 과연 나라를 다스린다는 인간들인가.  

결국 예송논쟁은 살육의 복수전으로 점철되고, 나라는 극도의 허무주의,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런데 이것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당쟁과 살육전은 나날이 진화했다. 갈수록 배신과 모함으로 국정이 파탄나는 판이었다.

#. 반면교사해야할 '조선왕조', 2021년 우리는 

지난 7월 25일 대검찰청 1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43대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식. (제공=대검찰청)
지난해 7월 열린 제43대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식. 검찰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대표적 권력 집단으로 통한다. (제공=대검찰청)

이 전통은 구한말까지 이어져 망국을 자초했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 전통은 이어져왔다. 지금도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오늘날은 기득권 대 반기득권의 싸움으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다. 왕조시대엔 기득권 대 기득권의 싸움이지만, 시민 민주주의로 전환한 오늘날은 기득권 대 반 기득권의 싸움으로 전환했다.   

5.16 이후 견고한 기득권의 성벽을 쌓은 구세력은 시민혁명이랄 수 있는 촛불혁명 이후 이른바 개혁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한치 양보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구세력은 주로 독재권력을 뒷받침해온 세력이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인사권과 자본을 쥐었다. 바로 이익 독점이다. 이익 독점의 달콤한 것은 빼앗길 수도 없고, 빼앗겨서도 안된다. 빼앗기면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도전세력을 용납할 수 없다.  

지금 시민의 민주의식이 발전했다고 해도 구세력의 권력 유지 스킬은 70년 체제동안 쌓은 비결이 있다. 이간질하여 분열시키고, 때로 빨갱이로 몰아 패가망신시킨다. 몰상식과 잔인성 외에 물적 토대도 든든하다.

아마튜어 같은 도전세력에 대한 방어벽은 몇가지 스킬만 내걸면 그냥 밟아버릴 수 있다.     

문재인이 정권을 잡았다고 했으나 권력을 쥐었다고 볼 수 없다. 정권 교체를 이루었지만, 권력 교체를 이룬 것은 아니다. 정권교체 되었으니 권력을 쥐었다고 보는 것은 큰 착각이다.

현재의 권력은 검찰, 언론, 사법부, 구정치 세력과 자본세력이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좌)과 윤석열 검찰총장(우)간 대립각은 개인간 분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침잠된 '기득권 vs 반기득권' 투쟁의 단면이란 해석을 낳는다. (사진 발췌=추미애 장관 페이스북, 대검찰청)

우리는 너무도 안이한 관점으로 오늘의 정치상황을 보고 있고, 그래서 출발선 또한 잘못된 곳에 서있다.   

사람들은 정의가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약자들의 자기 위안일 뿐, 여전히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는 미완의 과제다. 그렇다고 이 사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어나갈 힘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패배주의라는 마음의 적이 더큰 허무와 패배를 불러온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장식품일 뿐, 엘리트 특수집단의 독점물이라고 절망하기에는 감시망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 사회 엘리트층이 스스로 변화하는 길이 최상의 길이다.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필요도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옛 관성에 젖어서 경계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더많은 기회가 있다. 

자기 세력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면 필연코 반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치로 세상을 보고, 나은 세상을 향해 스스로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그들 자신이나 세상을 위한 길이다. 스스로 개혁의 실천자가 되는 길은 없는가.

그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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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민 2020-12-29 22:39:22
정말 좋은 글 입니다. 70년동안 권력을 잡고 있는 부패 기득권. 그들의 이간질과 조작질이 있다해도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KJH 2020-12-29 15:21:42
윤석열 총장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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