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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면 '이성산성', 세종시 최초 국가문화재 사적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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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면 '이성산성', 세종시 최초 국가문화재 사적되나
  • 정은진 기자
  • 승인 2020.11.09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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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굴조사 현장을 가다... 백제시대 축조 후 신라 점령 추정
계획조성 흔적 확인…단계별 발굴조사·국가문화재 사적 지정 추진
 세종 이성산성의 계단식 구조 ⓒ정은진

[세종포스트 정은진 기자] 그동안 예산 문제로 베일에 싸인 채 조명받지 못한 전의면 '세종이성(李城)'. 현재 세종시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존재하고 있다.

'세종이성'이 세종시 최초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도약 가능성을 노크하고 있다. 

실제 시 지정 기념물은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으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은 전무한 상황이다.  

세종시와 한성문화재연구원(원장 김병희)이 최근 전의면 신방리 일대 현장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하며, 이 같은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시굴 조사 과정에서 삼국시대 축조된 성벽시설이 확인되고 각종 유물이 발굴되는 등 역사유적의 재조명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양 기관이 지난 6일 현장에서 전문가 자문회의 및 현장 설명회를 연 배경이다. 이성의 정상부 일대와 동벽 구간 조사 상황을 외부에 공개했다. 

지금까지 지표 조사만으론 파악하기 어려웠던 사실이 하나씩 규명되고 있다. 정확한 축조세력과 시기, 방법, 성격 등이 구체화되면, 이성의 복원 정비 및 국가 사적 승격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 1차 성벽 전경 (왼쪽=세종시 제공), 이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오른쪽). ⓒ정은진

이성 정상부 일대에선 6~7세기 백제와 신라의 유물들도 다양하게 출토됐다. 이는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 양국이 대치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것으로 유추하고 있는 대목. 

시굴조사 결과 이성은 백제가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에 의해 점령됐고, 성벽은 2차례 이상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가장 바깥쪽 성벽은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와 관련된 성벽으로 추정됐다. 

한성문화재 소속 연구원은 "세종이성은 산성으로써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계단형식의 독특한 구조로 축조됐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계단식 구조는 거의 유일하다"며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위치적으로 높은 곳에 조성돼 역사 관광지로써 가능성까지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 이성 문화재 시굴조사 현황도(왼쪽), 문화재 시굴 드론 사진(오른쪽). (자료=세종시)

이성은 어떤 유적인가

세종이성은 금성산 줄기 북단에 있는 성으로 세종시 지정 기념물 제4호로 2012년 12월 31일에 지정됐다. 

높이 229m의 산 정상부에 테를 돌리듯이 감싸면서 축조된 테뫼형 산성이다. 고려 태조 왕건때 고려 개국공신 '이도'가 성을 쌓고 살던 곳이라 하여 이성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성 안에서 백제 말기의 기와 및 토기편이 많이 나온 것으로 미뤄볼 때, 백제 시대 국경 수비를 위해 축성된 후 계속 보수되면서 이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진 상태며, 원래의 성 높이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총 둘레는 486m이며,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조선시대 초기의 인문지리서인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크기가 1,184척이나 되었고 우물이 한 곳 있었다고 한다. 

세종이성 시굴조사 현장 모습. 시와 한성문화재 연구원이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차려놓고 시굴을 하고 있다.  ⓒ정은진

시굴조사엔 어떤 내용 담겼나

이성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처음 축조된 이후 점차 바깥으로 증축·확장을 해간 양상으로 확인됐다. 바깥 성벽의 높이는 약 8m 정도며 지형에 따라 사용된 성돌의 크기와 형태가 다르게 조성됐다.

동벽 안쪽 다짐층에서는 백제토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됐는데, 이로 미뤄볼 때 이성을 처음 축조한 국가는 백제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내 정상부 일대에선 4단으로 이뤄진 다중 평탄지가 확인됐고, 각 평탄지마다 석축을 쌓아 구획한 흔적이 발견됐다. 가장 아래쪽 1단은 다각 건물지, 2단은 저장시설, 3단은 지하 저수시설, 가장 위쪽 4단은 장대지를 배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각 평탄지는 용도에 따라 공간의 구획과 면적을 각기 다르게 했고, 서쪽 평탄지는 흡사 오늘날의 군대 연병장처럼 당시 군사훈련을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위계에 따른 공간 구분은 이성 산성의 축조가 계획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케하는 부분. 한성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톡특한 특징을 담은 것으로 파악됐다.

백영종 한성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은 "세종이성이 독특한 구조인 것은 맞다. 아직 시굴 단계로 정확하지는 않다. 더 진행해봐야 알겠지만 생각하는 바대로 진행되고 발굴되면, 국가지정문화재의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시는 이번 시굴조사로 기존의 성곽조사에선 확인되지 않던 이성의 구조와 양상을 확인했으며, 향후 연차별 발굴조사를 통해 세종시 내 삼국시대 산성의 특징과 역사성을 밝혀 나갈 계획이다.

김정기 세종시 관광문화재과 주무관은 "발굴 과정을 지켜보고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을 하려고 한다. 세종시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은 현재 없는 상태며 발굴 성과가 더 있어야 추진이 가능하다. 발굴 성과를 높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칠복 관광문화재과장은 “이성은 삼국시대 격전지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라며 “앞으로 연차별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향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을 추진해 복원·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성산성 시굴현장에서 발견된 토기. 약 1500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은진

앞으로 남은 숙제는

세종이성은 시 기념물로 지정된 후 8여년만에 제대로된 시굴작업을 맞이했다. 이처럼 시굴 작업이 늦어진 이유는 이성의 위치가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세종시 예산 투입의 순위에서도 뒤로 밀렸다. 

사유지에 있는 문화재는 문화재 지정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사유지 주인들이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세종이성이 위치한 사유지 주인들의 적극적인 허락 아래 이번 시굴조사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결국 앞으로 남은 과제는 비용 문제다. 문화재 발굴 이후 관련 예산 문제에 봉착해 발굴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은데, 세종시 예산 상태가 좋지 못하다.

세종이성의 발굴 흐름이 끊기지 않게 지속적인 관심과  행정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아름동에 거주하는 시민 이모 씨는 "세종이성의 물리적인 발굴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이야기를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시민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며 "직접 방문해본 세종이성 길은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 길을 관광상품화시켜 세종이성과 함께 개발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시굴을 통해 발굴된 유적을 설명하고 있는 한성문화재연구원들 ⓒ정은진
세종이성으로 가는 길 ⓒ정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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