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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한다리 사연 품은 '장군면 대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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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한다리 사연 품은 '장군면 대교리' 
  • 최민호
  • 승인 2020.10.1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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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소디 온 세종(Rhapsody on Sejong) 6편] 세종대왕과 충신 '김종서 장군'의 흔적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 김종서 장군 얽힌 아픈 역사, 되돌아본 세종특별자치시
김종서 장군 묘역으로 통하는 연결로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천년 역사를 가진 지역 이름이 바뀐 곳은 연기군(燕岐郡)만이 아니었다.

충남 공주시의 장기면(長岐面)도 그 이름이 없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장기면은 1914년부터 16개 리로 구성된 면이었는데,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이중 금암리, 대교리, 도계리등 9개 리와 의당면 5개 리(송정리, 송학리, 용암리, 용현리, 태산리)가 합쳐져 장군면(將軍面)이 신설되면서 그 명칭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장군면(將軍面). 그 이름의 기상이 범상치 않다. 

장기면과 의당면 일부로 구성된 이 지역이 장군면으로 명명된 것에는 장기면의 주산의 봉우리가 ‘장군산(將軍山)’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 세종대왕 때의 명장 김종서 장군이 바로 의당면 월곡리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김종서 장군의 묘가 장기면 대교리에 있다는 점을 종합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세종대왕과 김종서 장군. 

세종대왕의 아들 세조는 조선왕조 역사에서 첫 번째 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왕이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세조찬위(世祖簒位) 또는 세조반정(世祖反正)이라고 하며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도 한다.  

세조 즉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이 단명하여 손자인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수양대군은 단종 3년째인 1455년,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아 버리고 만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은 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후사를 당부하였는데, 과연 단종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신하가 집현전 학사 성삼문 등 '사육신'이요, 끝까지 절의를 지켜 벼슬을 거부한 신하들이 김시습을 비롯한 '생육신'이라 불리우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할 때 가장 두려워했던 세종의 신하는 김종서 장군이었다.

김종서(金宗瑞) 장군은 세종대왕 때 함경도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6진을 개척한 명장이었지만 그는 무인이 아닌 문관 출신이었다. 16세에 과거급제를 한 후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북방 안정을 비롯한 각종 민생 안정책을 세우고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용맹함이 호랑이 같다 하여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김종서 장군. 그는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 명신이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왕위찬탈을 하면서 가장 먼저 김종서 장군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김종서 장군을 철퇴로 때려 주살한 후 그의 팔다리를 갈갈이 찢는 능지처참을 하고 그의 자손들까지도 모두 척살하고 만다.  

김종서 장군을 제거한 후에야 단종의 왕위 찬탈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그의 쿠데타 세력이었던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서 장군은 그토록 무서운 존재였다. 

김종서 장군. 그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순천 김씨다. 자(어릴 적 이름)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그의 할아버지 김태영은 고려시대 병조판서(국방부장관)를 지냈고, 아버지 김추는 도총제(都摠制 : 지금의 합참의장)를 지낸 분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무를 갖춘 명문대가 출신이다. 공주의 순천 김씨 후손들은 이런 명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할 수 밖에 없다. 

장군면은 이런 김종서 장군의 존재와 자연스럽게 연유되는 지역이다. 그리고 김종서 장군은 세종대왕과의 관계에서 당연히 연상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시가 출범하기 전 행정구역과 도로등 공공시설 명칭을 세종대왕의 혼을 살린 명칭등으로 지으면서 ‘장군면’이라는 명칭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종서 장군을 연상하며 장군면을 돌아볼 때, 대교리(大橋里)가 유독 눈에 띠지 않을 수 없다. ‘큰 다리 마을’ 대교리(大橋里). 

대교천 위에 걸려 있는 다리라서 대교리인가? 현지에서 보면 대교천은 그리 큰 개천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작은 개천의 다리를 ‘큰 다리’라 하였을까?

구전에 의하면, 김종서 장군이 능지처참을 당했을 때 그의 시체를 수습할 경황은 아무도 없었다.

시신이 사방팔방 흩어져 수습할 유해마저 거둘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장군의 애마가 장군의 다리 한 쪽을 물고 그의 고향까지 달려와서는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김종서 장군을 기념하는 공간이 있는 장군면 대교리

마을 사람들은 말이 물고 온 김종서 장군의 다리 한 쪽을 산에 묻었다. 그 산소가 대교리에 있는 지금의 김종서 장군 묘인 것이다. 

그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대교리 일대를 ‘한다리’라 불렀다. '한다리'. 우리말의 ‘한’은 ‘한쪽’이라는 뜻도 있지만, ‘크다’라는 뜻도 있다. ‘다리’도 ‘사람의 다리(脚)’도 있지만, 물 위를 ‘건너는 다리(橋)’라는 뜻도 있다. 

그리하여 명명된 지명이 ‘대교리’인 것이다. 

유추해보면, 당시 김종서 장군의 다리를 묻었다 하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집권층이 이를 용납하였을까?

김종서 장군의 유해를 한양에서 공주까지 수만리 길을 어떤 사람이 품고 왔다 하면, 그 사람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말이 물고 왔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한양과 고향을 수없이 다녀 보아서 말이 길을 알았다고 하면서... 말이 물고 온 한 쪽 다리. 그러나 대교천이 흐르는 큰 다리. 대교리. 묘한 중의적 은유가 있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면 묘한 생각이 든다. 

김종서 장군은 세종대왕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명문 출신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세종대왕은 김종서 장군에게 죽음을 불사하며 충성을 다한 주군이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묘호(廟號 : 임금이 죽은 뒤 그 임금에 대해 붙이는 이름)를 딴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동시에 출범한 '장군면'.

이를 역사의 우연이라 볼 것인가 필연이라 볼 것인가. 

2012년 12월 31일 세종시는 순천 김씨 종산에 있는 김종서 장군의 묘를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했다. 

그 후 가락마을 8단지 교차로에서 아름동 범지기마을에서 국무총리실 공관 앞 사거리를 지나 국책연구단지 앞에 이르는 7km 구간의 도로명을 김종서 장군의 호를 따서 ‘절재로’라 하였으며, 매년 11월이면 유림 및 지역 기관장들이 김종서 장군 제향을 지내고 있다. 

세종시 신도시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김종서 장군 그리고 그의 호를 따 이름 붙인 '절재로'

세종(世宗)시가 출범하면서 김종서 장군의 고향과 묘가 있는 장기면과 의당면 일부를 편입하여 장군면(將軍面)이라 명명한 것은 어떤 연유일 지 생각해봤다.

'세종시를 지키라'는 세종대왕의 지엄한 분부와 김종서 장군의 충절의 언약이 구천에서부터의 염원과 함의(含意)로 서려있는 운명같은 것은 아닐까 싶어 김종서 장군의 묘역과 충마사(忠馬祠: 김종서 장군의 애마를 기리는 정자)를 돌아볼 때는 숙연해지고 만다.

최민호 전 행복도시건설청장
최민호 전 행복도시건설청장

<랩소디 온 세종(Rhapsody on Sejong)>

랩소디(Rhapsody)는 그리스의 서사시를 뜻했고, 현재는 ‘환상곡풍의 자유로운 노래’, 그래서 우리말로는 광시곡(狂詩曲)으로 번역한다.

세종시는 랩소디로 작곡하기에 아직 역사가 얕다고 말할지 모르나, 가파른 흐름이 담긴 파란만장한 압축이 녹아있는 도시로 미친듯이 노래로 환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랩소디 온 세종(Rhapsody on Sejong)’은 그렇게 불러보는 세종의 태동과 애환과 미래를 노래하는 글이다. 랩소디는 서사적이자, 영웅적이자 민속적인 노래다. 단악장이고 형식도 자유롭다.

세종을 노래하는 글, 최민호의 ‘랩소디 온 세종(Rhapsody on Sejong)’을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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