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장군 재조명’, 세종시 장군면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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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장군 재조명’, 세종시 장군면의 미래
  • 이계홍
  • 승인 2020.07.04 0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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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세종 한 바퀴 ‘장군면 1편’] 쓸쓸한 장군 묘역, 300년 숨죽인 세월 
절재로→김종서로 변경, 묘역까지 도로 연장 제안... 내년 역사테마공원 내실화 기대
국책연구단지 앞 4거리에서 아름동 범지기마을 1단지에 이르는 7km 구간이 절재로다. 
국책연구단지 앞 4거리에서 아름동 범지기마을 1단지에 이르는 7km 구간이 절재로다.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절재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절재로’는 세종시 가락마을에서 아름동~세종포스트빌딩 앞 네거리~정부세종청사 뒤편-국책연구단지까지 7km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조선조 초기 6진 개척의 주인공이자 문신인 절재 김종서(1383~1453)의 호를 따 명명한 도로명이다. 

가락마을에서 서쪽 산언덕을 넘으면 바로 김종서 장군 묘역이 나온다. 공주 방향으로 돌아서 농로를 따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묘역이 소외되고 멀게 느껴지지만, 고운동에서 보자면 고개 하나 넘으면 곧바로 닿는 지점이다. 

이 묘역까지 ‘절재로’를 연장시켜 접근성, 인접성, 편의성을 높이자는 의견들이 있다. 도로명도 ‘절재로’ 대신 ‘김종서로’로 바꾸자고 말한다.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 평야의 끝 지점 산에 둘러싸여 있는 김종서 장군 묘역은 현재 역사테마공원으로 조성중이다. 한국고고환경연구소가 세종시청 의뢰로 김종서 장군 묘역 역사테마공원 조성사업 부지 내에서 유물을 발굴하기 위한 작업도 벌이고 있다. 

내년까지 진행되는 역사테마공원 조성 사업에는 현재 완공된 사당과 재실을 비롯해 앞으로 들어설 수목원과 생태연못, 주차장을 조성하고, 김종서 장군을 주제로 한 북방 개척 전투 조형물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 김종서 장군, 그래서 ‘장군면’? 

역사공원으로 조성 중인 김종서 장군 묘역 일대. 

장군면은 전에는 행정구역이 공주시 장기면이었으나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김종서 장군의 고향임을 알리고,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했다. 

세종 신도시와 인접해있는 관계로 장군면은 어느 읍면 지역보다 도농 복합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국도변에서 대교리 김종서 장군 묘역에 이르는 약 4km의 평야에는 벼가 푸르게 자라고, 이쪽 저쪽 야산에는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숲속에 가려진 듯 드러난 깨끗한 전원주택들이 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기에도 아름답고 평화롭다. 이곳에서 승용차로 세종 신도시나 공주 시내로 나가려면 20분대에 가닿으니 도심 속 별장생활을 하는 인상을 준다. 

√ 쓸쓸한 ‘김종서 장군 묘역’ 

김종서 장군 묘역 전경. 

그런데 김종서 장군 묘역은 쓸쓸하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초‧중‧고생들의 견학이나 일반인의 참관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렇다 할 부대 시설이 세워지지 않아서일까, 묘역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테마공원 조성 중이라고 해도 역사 속 인물이 방치된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김종서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점 때문이다. 

√ 역사 재조명 필요성, ‘한반도 국경 획정’   

김종서 장군 묘역 일대에선 문화재 조사가 한창이다. 

하나는 백두산 북편과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해 한반도 국경을 획정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수양대군(세조) 세력에 의해 3부자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6진 설치부터 살펴보자. 김종서는 1433년 12월 함길도관찰사(오늘의 함경도지사)에 임명되어 현지 부임한 뒤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첩서를 보냈다.

"상감마마의 명을 받잡고 현지에 와서 백두산에서부터 두만강 하류를 점검했으나 현재의 허술한 4진으로는 부족하고, 기왕에 설치된 종성·온성·회령·경원에 이어 경흥·부령에 더 진(鎭:진영의 준말)을 설치해 여진족을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진 오랑캐가 두만강을 넘어와 우리 백성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으니 이를 철저히 막아야 하겠습니다.”

세종이 이에 명을 내렸다. 

“김 장수가 계획한대로 허술한 진을 단단히 보강해 약탈에 대비하고, 두만강 하류까지 지역을 넗혀 진을 더 세워 국경을 명확히 하고, 영토를 보전하라.”

이렇게 해서 6진이 설치되어 오늘의 국경이 결정되었다. 

√ 300년 숨죽인 세월, ‘재평가’ 이뤄져야 

김종서 장군 묘역에 오르는 길.

두 번째는 수양대군(세조) 세력에 의해 3부자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5대왕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단종(6대)이 왕정을 수행할 때까지 좌의정으로서 신정(臣政)에 나섰으나 단종의 삼촌이자 문종의 동생, 즉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로 3부자가 목숨을 잃었다.

김종서는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고명대신이란 국왕의 유언을 받드는 정승을 말한다. 대를 이어가는 후임 왕을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섭정승(攝政丞)이라고도 한다. 왕이 일찍 죽으면 대개 후임 왕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섭정승이 필요했다.

세종의 장남 문종은 병약해서 보위 2년만에 죽는다. 죽기 전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에게 신신당부했다.

“과인이 병약해서 아무래도 일찍 떠날 것 같소.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일이 있으니, 이제 열 살 밖에 안된 어린 세자 때문이요. 과인이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세자가 왕위에 올라 법통을 이어받도록 힘써 보호해주시오.”

그렇게 당부한 뒤 문종이 다음해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의 삼촌이자 문종의 동생, 즉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가 섭정을 통해 왕위를 이어가자 왕족으로서 불만을 품었다. 

왕권 대신 신권이 득세한다고 보고,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 인물들을 모으고 주먹이 센 장정들을 모아 거사를 준비했다. 

수양대군에게 강적은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담력과 뛰어난 무술을 갖춰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무장으로서 백두산과 두만강을 거닐며 여진족을 무찌른 기상은 그대로 그의 시에 담겨있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시는 그대로 한민족의 기상을 말해준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는 담대한 대륙정신과 기개가 살아있다.  

그런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는 정적 제거의 0순위였다. 어린 조카로부터 정권 찬탈 음모를 꾸미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김종서를 제거하지 않으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김종서 제거작전을 세운 어느날, 수양대군은 직접 양정, 유숙 등 장사를 데리고 새문안(오늘의 서울 광화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왕이 부른다고 그를 대문 밖으로 불러냈다. 

수양대군이 상감의 편지를 읽어보라고 김종서에게 건네주자 김종서는 편지를 달빛에 비추어 보는데, 이때 장사 임어을이 철퇴를 휘둘러 김종서를 때려눕혔다.

비명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큰아들 김승규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 이때 장사 양정이 대검으로 김승규의 목을 쳤다. 김승규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김종서는 쓰러진 채 피를 쏟았다.  

김종서가 죽은 줄 알고 수양대군 일행이 돌아간 뒤 김종서는 둘째아들의 처가 댁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날이 밝자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수양대군의 부하 양정, 이흥상, 홍순손 등이 달려와 기어이 그를 살해했다. 이때 둘째 아들도 무참히 살해당했다.

수양대군 일당은 김종서의 유체를 찢어서 냇물에 버렸다. 김종서의 두상은 ‘대역죄인’이란 이름으로 효수되었다. 살아남은 유족들이 수습한 육신이 김종서 장군의 한쪽 다리 부분이었다. 

√ 장군면 ‘김종서 묘소’ 탄생 배경 

이것을 고향인 장군면 대교리에 묻은 것이 오늘날의 김종서 묘소다. 그러니까 김종서 장군의 온전한 유체는 사라지고, 육신의 한 조각만 묻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린 순천김씨 문중은 300년 동안 숨죽이며 살았다. 

수양대군 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ᐧ합리화하기 위해 김종서를 ‘권신’이라고 깎아내리고 ‘대역죄인’이라고 몰아붙였으나 그것은 승자의 기록일 뿐, 후대 사람들은 권신이 아니라 철저한 충절과 의리의 정치인으로 그를 평가했다. 

세종의 뜻을 충실히 받들고, 문종과의 의리를 지켰으며, 어린 왕을 사심없이 받든 명신이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 변경에서 6진을 설치하고, 여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았다. 

김종서는 세종 대의 학자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황희 등과 폭넓은 학문적 교류를 했다. 김종서를 흔히 무장으로 알지만, 그에 앞서 그는 탁월한 문신이었다. 16세때 과거에 급제한 실력파로서 당대의 두뇌라던 신숙주,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절요’ 편찬 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문무를 겸장하니 역대 왕들이 그를 중임했다.  

당시 벼슬의 위계로 보아 영의정은 나이 많은 상징적 인물이고, 우의정은 좌의정을 보필하는 역할이니 실질적 권한은 좌의정에게 있었다. 이런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큼 그가 실력과 덕망과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제거해야만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고 본 수양대군이 그의 일가족을 도륙해버린 것이다.  

√ 후대인 세종시에게 던져진 숙제는  

본지 이계홍 주필이 마을 주민으로부터 '김종서 장군'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영조시대 김종서는 여러 신하들과 순천김씨 문중의 진정으로 복권되어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북방 변경과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대호 김종서가 우리 역사에 호출되기까지 3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던 셈이다.  

그런 위인이 세종시 출신이다. 세종시는 김종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가락마을 8단지 교차로에서 아름동 범지기마을을 지나 국책연구단지까지 7km에 이르는 도로를 ‘절재로’로 명명했다. 

그러나 ‘절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반면 김종서라는 이름은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하다. 따라서 잘 모르는 ‘절재로’ 대신 ‘김종서로’로 도로명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고운동 가락마을에서 김종서 장군 묘역 역사 테마공원까지 절재로를 연장할 필요가 있다. 산언덕을 연결하면 세종신도시에서 직선 코스로 역사 테마공원까지 직접 가닿을 수 있다. 접근성과 인접성, 주민의 편의성이 배가될 것이다. 

끝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시민의 이해다. 세종시민이 이 고장 출신의 역사적 인물을 잘 모른다면 시민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각 주민자치센터는 물론 학교에서도 이 지역 출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김종서 특강을 개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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