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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된 6.25둥이의 외침, "전쟁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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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된 6.25둥이의 외침, "전쟁은 없어야 한다"
  • 이주은 기자
  • 승인 2020.06.26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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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시리즈 4편] '세종포스트' 독자가 보낸 6.25 이야기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긴 6.25 사변둥이 '임황분 씨'의 인생기
6.25 전쟁에 태어난 갓난 아기가 이제 70대가 되었습니다. 독자께서 보내주신 오래된 사진 한 장. 

[세종포스트 이주은 기자]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6.25전쟁.' 마침 1950년 6월 25일 충남 아산시 둔포면 관대리에서 태어나 70세를 맞으신 <세종포스트> 애독자께서 한 통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때는 누구나 다 그러고 살았지요”란 말씀 한마디에도 짠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누군가에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6.25가, 또 누군가에는 평생 잊지 못할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황분 독자님께서 낡은 수첩에 틈틈이 적어 내려가신 담담한 삶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가급적 편지 그대로 공개해 독자가 전하고하는 메시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편집자 주>

'세종포스트'에 보내주신 독자의 수첩 속 70년 전 6.25 이야기. 전쟁을 지나 온 삶의 궤적이 너무나 숭고하게 다가온다.

나는 1950년 음력 5월 18일생이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 바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힘들게 세상 구경하려고 태어났는데 전쟁이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무더운 여름 6월의 하늘은 무척 더웠다고 한다. 그 더운 날에 날 낳아주신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시다. 방에 장작으로 불을 때 가면서 몸조리를 했다는데, 밖에도 못 나가고 얼마나 더웠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고 바로 6.25가 일어나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는데, 어머니는 나를 낳고 몸조리를 하느라 피난도 못 가셨다고 한다.

 

-편지 서문 중-

√ 북한군과의 대면

전쟁 통에 요란한 밖을 살피며 어머니가 구들장에서 몸조리를 하던 어느 날, 인민군이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 곳곳을 살피다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몸조리하던 중이라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니 얼굴을 들이밀며 “뭐야!”하고 소리를 치더란다. 다들 피난을 가는데 집에 사람이 왜 있냐는 말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날 안고 놀라니 “에미나이, 아새끼 났구만!”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더란다.

 

그 순간 어머니가 얼마나 간이 철렁했을지…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감임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멎을 뻔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인민군도 인정은 있더라”하시며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총을 들고 쏠 것 같으면서도 그냥 뒤돌아가면서 “몸조리 하라우”하면서 가는데 십년감수 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쁜 사람이었으면 너와 나는 죽었을 거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6.25만 돌아오면 어머니에게 매년 연례행사처럼 들었다.

√ 하마터면 전투기 폭격받을 뻔

며칠 후 남들은 모두 피난을 가는데 우리 가족은 피난 갈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어머니 혼자 집에 있기 무서워 날 안고 아버지가 일하시는 들로 나갔다. 햇볕이 너무 뜨겁고 더워 나무 밑에 그늘막을 만들어 나를 눕혀 놓았다. 그때 갑자기 우리가 있는 쪽으로 전투기가 낮게 날면서 들어왔다. 빙글빙글 돌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찰라, 아버지가 급하게 달려와 그늘막을 파헤치니 아기와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는지 전투기가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잠시 후 그 전투기는 멀리 있는 산으로 가서 폭격을 퍼부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조금만 늦었어도 너와 나는 또 죽을 뻔했다”며 “우리 둘은 오래 살 운명인가보다”고 말씀하셨다.

 

6.25를 회상하며 오래된 앨범에서 꺼내 든 사진. 생전 얼굴 한 번 못본 전쟁 통에 운명을 달리한 언니와 친청엄마의 젊었을 적 모습.

√ 언니 둘에 오빠 하나 전염병에 잃어

모두가 떠난 마을, 결국 우리 집도 피난길에 올랐다. 여덟 식구가 짐을 싸서 출발하기 전, 집에 있는 곡식을 모두 땅속에 묻어두고 떠났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히고 언니·오빠는 걸어갔다고 한다.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을에 괴상한 병이 돌아 마을 사람들이 꽤 많이 죽었다. 언니와 오빠 3명도 모두 설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슬픈 기색도 없이 당장 남겨진 가족을 챙겨야만 했다. 얼마나 슬펐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다. 당시 나는 어머니 모유를 먹었다. 곡식이 부족했기에 더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많은 마을 사람들은 참 많이 죽었다.
 

전쟁 때문에도 너무나 슬픈 일이 연거푸 생기는데, 아이들까지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난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집안의 물건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장독 밑에 묻어둔 쌀도 다 가져가고 남은 것 하나 없어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한다.

√ 경찰과 공무원은 북한군에 신고돼

먹고살기만 힘들었을까? 전쟁이 계속되는 그 와중에 흉흉한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한번은 집안에 경찰이나 공무원이 있으면 다 잡아가고 죽인다고 마을에 소문이 파다했다. 인천에 사는 이모부가 경찰이라,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걸 알게 된 이웃이 신고했고, 인민군이 이모부를 잡으러 집으로 온 일이 있었다. 집안을 수색하기 위해 들어온 순간, 어머니는 신고한 이웃의 따귀를 때리면서 “찾아보라”고 강경하게 대처했다.
 

인민군은 결국 “없는 것 같다”며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뒤돌아 나가는 순간 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셨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시며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넋이 나가 말씀하셨다.
 

전쟁 통에 태어나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항상 ‘전쟁’이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사는 모습을 보면 '언제 전쟁이 있었나?' 싶지만, 아직도 가끔은 예전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전쟁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하다.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을 가던 내가 이제 칠순의 노인이 되었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겨 ‘오래 살 거다’ 장담한 어머니는 94세에 소천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명 길게 살다가 가셨다며 장례식에 오셔서 모두 ‘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이제 ‘고아’다. 엄마·아빠 없는 고아. 뭇 사람들은 웃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부모’의 존재가 그러하리라 믿는다. 하늘이 도와 ‘전쟁고아’는 아니었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전쟁의 아픔이 마음 깊이 남아있다.
 

내가 겪은 이 아픔, 다시는 다른 이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친정엄마가 되뇌던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최근 악화된 남북관계가 다시 개선되어 진정한 평화통일과 민족번영의 그 길로 나아가길 바라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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