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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망월동 성역’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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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망월동 성역’을 가다
  • 정은진 기자
  • 승인 2020.05.17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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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항쟁 40주기, 문 대통령부터 전국 각지서 모여든 사람들
민주주의 외침은 계속된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숙제는 여전
5.18 민중항쟁을 판화로 그려낸 홍성담 화가의 작품 '광주의 어머니'
5.18 민중항쟁을 판화로 그려낸 홍성담 화가의 작품 '광주의 어머니'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등 뒤에는 30명의 유령들이 서 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비율이 바로 30대 1이기 때문이다...(중략)."

"인간들은 지금까지 이 미래의 가능성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일이 결코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

- 아서C. 클라크 

[세종포스트 정은진 기자] 현재는 과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만 과거는 명료하게 드러나있는 현재와는 달리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으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과거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현시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주권도 과거의 어떤 이들의 처절한 외침 위에 이뤄졌다는 것 조차 때론 망각하며 살아가는 지금이다. 

민주주의가 그랬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이 당연한 제도가 불과 40년 전만해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사람들의 피묻은 외침은 40년동안 정치색과 지역색, 물질문명 아래 희석되기도 하고 되새겨지기도 했다. 마치 사라졌다 나타남을 반복하는 형체 불분명한 혼령처럼 말이다. 

필자는 민주주의 이전의 군부독재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다. 그러했으리라 말하는 역사의 증거들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유추할 뿐이다. 다만 그것이 실재했던 일임을, 많은 증거들이 사실과 귀결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를 향하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지던 40년 전 '1980년 5월 광주'. 그 외침이 형체가 불분명한 혼령같은 존재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증명들을 마주하기 위해, 광주 망월동을 찾았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계엄군에 희생된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광주 망월동의 구묘역

■ 5・18 민주화운동, 그 배경과 사실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유신정권이 막을 내렸다. 그 후 불안한 정국을 틈타 쿠데타(12・12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에 의해 신군부독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국민들의 분노와 불만은 고조되어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확산됐다. 신군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관련자를 구금하고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대학교, 각종 언론사에 계엄군을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5일, 이에 항의하는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서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에서 비상계엄령을 의결했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남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했다. 울분을 터트린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일반 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했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과 탱크 등으로 이를 진압하던 계엄군 (사진=5.18 기념재단)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며 거리로 모여들었으며, 계엄군과 시민 간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 4명과 시민 2명이 사망했다. 시위대 대표가 계엄군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 요구는 결렬되고 이어진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발표로 사상자 및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이 집단발포 이후 시위대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전남 나주, 화순 등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 탈취로 무장을 시작했다.

시위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했으며,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계속해서 계엄군을 압박해 간 결과,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 시내를 장악했다.

여성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하거나 부상자들을 돕기위해 자발적 헌혈에 앞장서기도 했다. 

더 이상의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구성된 '5.18 수습대책위원회'. 이로써 무장해제와 수습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해 도청과 시내를 장악하고 결국 시위대는 무력진압 상황에 놓인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쓰러진 사람들이 묻힌 망월동 구묘역
망월동 구묘역의 분위기는 아직도 그때의 참상이 생생하게 느껴지리만치 숙연하다. 

■ 민주주의를 외친 영령들이 잠든 망월동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쓰러진 사람들은 129명. 이들은 수레와 청소차 등으로 실려와 1980년 5월 29일, 합동 장례식으로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직접 사망자는 193명으로 추산되며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 행방불명자는 65명, 부상과 고문 피해자는 4728명에 이른다. 

시위 기간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소식들이 조금씩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곧 언론에 보도되어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사건의 실체는 해외 언론을 통해서도 전파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잠입한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보도사진을 통해 5.18의 실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생전에 "내가 죽거든 광주에 묻어달라"고 주변에 말해왔던 위르겐 힌츠페터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이 현재 이 곳, 망월동 구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무력진압 과정에선 임신 8개월의 가정주부와 비교적 나이 어린 대학생도 확인됐다. 사진은 피해자 묘의 영정사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도 있다. 무명열사라 칭하고 따로 안장되어 있다.  

그후 정권의 5.18 증거인멸을 위한 움직임은 지속됐다. 광주시민들은 망월동 구묘지를 없애려는 정권의 동태를 파악, 묘지 성역화 사업에 나섰고 1997년 신묘역 이장이란 결실을 맺게 된다.  

현재 구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묘사하고 있고 국내·외 참배객들의 발길 또한 묻어있는 곳이기에 과거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잘 정돈된 신묘역과는 달리 구묘역에는 특유의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때의 참상을 예상케하는 무덤 배열이며 오래된 영정사진, 죽은 이들의 사연이 적힌 글귀와 이들을 기리기위해 함께 보존해둔 편지 내용 등이 신묘역과는 사뭇 다른 역사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남편의 마중을 나가다 총탄에 맞아 숨진 임신 8개월의 여성 등의 묘역 앞에선 발길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앳된 얼굴의 영정사진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과거 사실과 오버랩된 현시대의 책임감에 눈시울이 불거졌다.  

1997년 5월 16일 완공된 국립5.18 민주묘지 내부. 추모탑이 조형적으로 세워져있다. 

■ 새로운 묘지, 국립5.18 민주묘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앞서 언급한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화 성지로 승격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면서, 광주광역시가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묘역을 조성하게 된다. 위치는 구묘역의 길건너 옆, 북구 운정동 산34번지의 165k㎡ 부지 위에 조성되었다. 

국립5.18 민주묘지(신묘역) 내부 1
국립5.18 민주묘지(신묘역) 내부 2

1994년 11월 착수된 이후 1997년 5월 16일 완공된 신묘역. 구묘역에 묻혀있던 5.18 희생자들이 이곳으로 대거 이장된다.

현재 이곳엔 이장된 후 깨끗하게 조성된 5.18 희생자 묘들과 함께 지속된 민주화 운동으로 숨을 거둔 사람들 또한 안장되어 있다.

역사와 민주주의를 바로 알기위한 대형 전시장과 40m 추모탑, 각종 기념비, 휴게공간 등도 조성됐다.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마주보는 공원으로써 역할까지 겸비하며 현재까지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전국민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묘역의 비석 뒤에는 이들을 기리는 가족과 지인들의 글귀가 쓰여져 있다. 

특히 신묘역의 비석에는 이들을 가슴에 묻은 가족과 지인들의 글귀가 쓰여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묘비마다 다르게 글귀를 읽으면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절절한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어 참배하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한편, 망월동 묘역은 5.18을 기리기위해 만든 '518번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이 버스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 주둔지였던 상무지구를 출발해 옛 전남도청, 망월동 국립민주묘지 등 10여곳을 한 노선으로 운행하고 있어 광주 방문시 쉽게 주요 사적지를 방문할 수 있다. 

신묘역에서 바라본 무등산과 망월동

■ 미래가 있는 사회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현재 40주년을 맞이한 5.18 민주화운동은 최근 각종 언론과 방송사, 매체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이다. '택시운전사'와 '26년', '화려한 휴가' 등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김군', '5.18 힌츠페터 스토리' 등으로도 만들어져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세종시에서도 18일 보람동 세종시청앞 잔디광장에서 4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서 영화제와 기록 전시회, 자전거 행진, 5.18 당시 여성들이 시민군 지원 차 만들었던 주먹밥을 재현하는 행사 등 다양한 시민참여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이런 움직임은 비단 과거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미래가 있는 건강한 사회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는 현재와 나아가 미래와도 귀결되기 때문이다. 

5월, 민주주의를 부르짓던 영령들은 죽지않고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뒤에 서 있다.

자신들이 민주주의가 시작됨을 알렸던 실존의 역사였음을, 또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미래라는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음을 온 몸으로 절감한다. 

참담한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것. 선혈로 얼룩졌던 오월, 5.18 민주화 운동의 영령들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할 이유다.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후대인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숙제다.  

망월동에서 진행된 장례식 사진(좌)과 독일 슈피겔지에 실려 5.18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우) (사진 = 5.18 기념재단)
망월동 국립 5.18 민주화묘역 민주의 문 앞의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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