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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공고에 여전한 전두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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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공고에 여전한 전두환의 흔적
  • 김수현
  • 승인 2012.10.17 1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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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고 검도부가 8강에서 분패한 날, 그 씁쓸함은 더해만 가다

12일(금) 세종고 검도부 경기가 대구공고에서 열렸다. 대구공고,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대구공고 하면 수식어처럼 따라오는 사람,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했으니 전두환씨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12.12 군사 쿠데타로 내란을 일으키며 수천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도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없고, 수중에 29만원 밖에 없으면서도 떵떵거리며 사는 전 씨의 출신학교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기분은 복잡미묘했다.

세종시 검도부는 8강전에서 충북공고에게 아깝게 분패했다. 상대팀이 연습경기에서는 줄곧 이기던 팀이었고, 세종시 첫메달을 기대했던 종목이라 더욱 안타깝고 허탈했다. 선수단과 임원진, 학부모 그리고 응원단 모두가 침울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기자도 마음이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경기가 열린 대구공고 교내를 돌아봤다. 전두환씨에 대한 복잡미묘한 마음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수단도 떠났고 다음 취재까지 잠깐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차량 통제를 하는 대구공고 학생들에게 전씨의 사진이나 기념관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학생들은 갸우뚱거리며 한참이나 생각을 하고 난 뒤 학교본관 입구에 사진이 있다고 안내했다. 얘기하는 어투로 봐서 학생들 세대에서는 전 씨에 대한 존재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본관 입구를 아무리 뒤져봐도 전 씨의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학생들의 착각일 수도 있어 본관 4층까지 올라가 봤지만 전씨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다. 1층에 있는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께 여쭤보니 작년에 전 씨의 사진을 철거했다고 전했다. 전씨의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대한 격앙된 국민들의 여론 때문이었다.

그럼 전씨의 잔재를 모두 청산한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찾을 수가 있었다. 교무실을 나와 학교를 둘러보았다. 본관 바로 앞에는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모교방문, 1994년 4월 22일’이란 표지석과 함께 전씨가 식수한 향나무가 남아 있었다. 또한 본관 뒷건물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일해정(日海亭)’이란 정자가 자리하고 있고, 표지석에는 ‘휘호 전두환(제24회 졸업),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2007년 10월 21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해(日海)는 전씨의 호(號)이다. 그리고 대구공고를 방문하는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성실’ ‘창의’ ‘협동’이라고 쓰인 ‘교훈비’이다. 교훈비 뒷면에는 ‘휘호 전두환(제24회 졸업),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2008년 8월 15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 대구공고 본관 바로 앞에는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모교방문, 1994년 4월 22일’이란 표지석과 함께 전 씨가 식수한 향나무가 남아 있다.
▲ 대구공고 일해정 표지석에는 ‘휘호 전두환(제24회 졸업),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2007년 10월21일’이라고 쓰여 있다.
▲ 대구공고 교훈비 뒷면에는 '휘호 전두환(제24회 졸업),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2008년 8월 15일'이라고 쓰여 있다.

2010년 10월 10일, 대구공고 체육대회에서 전씨를 찬양하는 행태가 벌어져 빈축을 산 적이 있다. 대구공고 동문들은 전 씨의 팔순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들고 입장했고, 체육대회 운동장 바닥에 엎드려 전 씨 부부에게 큰절을 하는 촌극을 벌였다. 물론 전씨 부부는 봉황이 그려진 단상에서 동문 후배들의 팔순 축하 큰절을 받고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전씨는 12,12 군사쿠데타, 무고한 시민 학살, 민주주의와 인권탄압, 비자금 조성과 부정축재 등 자신의 불의한 정치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를 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

수중에 29만원 밖에 없다고 주창하면서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고, 법적으로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으면서도 현실에서는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에 의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과분히 받고 있다.

전씨가 야만의 시대에 휘둘렀던 광기와 폭력은 이성과 상식에 대한 부정이었고, 사과와 반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자행한 야만의 역사를 합리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70년 겨울,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바르샤바 케토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나치에 의해 40여만 명이 희생된 유대인 게토지구에 세워진 추모비에 진심어린 용서를 구했고, 빌리 그란트의 헌화는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에 유럽인들이 마음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빌리 그란트의 진심이 유럽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단 한차례도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형식적인 정치적 수사만 난무했을 뿐, 과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이에 대한 후과는 지금도 정신대 할머니와 독도 문제에 대한 역사 왜곡으로 명징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씨에 대한 대구공고의 향수와 자긍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전씨는 어느 곳에서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로 칭송받으며 과거 권력의 향수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사과와 반성에서 분명한 입장차를 보였던 독일과 일본, 전 씨의 길은 자명한 듯하다.

세종시 검도부가 8강에서 아깝게 분패한 날, 전 씨로 인해 그 씁쓸함과 황망함은 더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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