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패전국 일본'을 살려준 미국, 역사의 과오
상태바
'패전국 일본'을 살려준 미국, 역사의 과오
  • 이계홍 주필
  • 승인 2020.02.14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계홍 주필의 현대사 특강(4)] 70여년 역사 왜곡의 본질, 친일·친미파 득세 배경
냉전체제, 이념갈등 '효율적 통제 수단'으로 남아
미국은 패전국 일본에 관용을 베풀었고, 이는 한국사 왜곡의 전주곡이 됐다.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으면서 일본의 ‘천황제’를 인정했다. 

 

일본의 ‘항복문서’에는 ‘항복’ 대신 ‘종전’이라 표기되어있고, 일본왕의 8.15 항복방송도 항복한다는 말 대신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전쟁을 끝낸다(종전)”는 뜻이 담겨있다. 

 

말하자면 ‘뜨거운 아이스크림’, ‘차가운 열탕’ 같은 형용 모순을 문서에 담았다. 이것을 미국이 양해한 것이다.

 

다음은 히로히토의 소위 ‘항복 방송문’이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생각하건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황종의 유범으로서 짐의 권권복응하는 바 전일에 미·영 양국에 선전한 소이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전을 서기함에 불과하고 타국의 주권을 배하고 영토를 범함은 물론 짐의 뜻이 아니었다. 

 

연이나 교전이 이미 사세를 열하고 짐의 육·해 장병의 용전, 짐의 백료유사의 정려, 짐의 1억 중서(衆庶)의 봉공이 각각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필경에 호전되지 않으며 세계의 대세가 또한 우리에게 불리하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 차해에 미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하게 된다면 종래에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결국에는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각하게 될 것이다. 여사히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하며 황조황종의 신령에 사할 것인가.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게 한 소이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종시 동아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에 죽고 직역에 순하고 비상에 패한 자 및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면 오체가 찢어지는 듯하며, 또 전상을 입고 재화를 만나 가업을 잃어버린 자의 후생에 관해서는 짐이 길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하면 금후 제국의 받을 바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다. 

 

그대들 신민의 충정은 짐이 선지하는 바이나 짐은 시운의 돌아가는 바 심난함을 감하고 인고함을 인하여서 만세를 위해서 태평을 고하고자 한다.

 

짐은 여기에 국체의 호지함을 얻어 충량한 그대를 신민의 적성에 신의하여 항상 그대들 신민과 함께 있다. 만약 정에 격하여 사정을 난조하여 혹은 일명 배제하여 서로 시국을 어지럽게 하고 대도를 그르치게 하여 신의를 세계에 잃게 함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 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어라.  

 

이상의 내용으로 일왕 히로히토는 미국의 사전 양해 아래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과 조선 등 식민지 전 지역에 NHK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위 이렇게 ‘항복 방송’을 했다. 

 

그러나 이건 항복문이 아니다. 그저 억울할 뿐 가해자로서의 반성은 눈을 씻고도 찾을 길 없다. 

 

그때 그의 육성을 듣기는 처음이었고, 방송도 최초의 일이었다. 열악한 음질과 ‘황조황종’ ‘유범’ ‘권권복응’ ‘백료유사’ ‘정려’ ‘중서’ 따위의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 용어, 그리고 히로히토 특유의 웅얼거리는 듯한 분명치 않은 발음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핏 알아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방송 내용에는 항복을 한다든지 패전을 했다든지 잘못을 시인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동아의 안전과 번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대동아공영권)이었는데, 연합군이 잔학한 폭탄을 투하하여 무고한 백성을 살상 당했다’고 억울해한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 차해에 미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고 비통해한다. 

 

이런 지도자가 어디 있는가. 수천만 식민지 백성을 노예나 짐승 부리 듯하고, 어린 소녀의 정조를 아무렇지 않게 빼앗고, 수백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인 죄과에 대해선 한마디 사과하고 반성한 것이 없다. 

 

그는 또 '동아시아 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이며, 굳게 신국(神國)의 불멸을 믿으라는 것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으니 다시 힘을 키우자고 말한다. 항복인지 격려인지 푸념인지 문맥만으로는 헷갈리는 가운데서도 청천욱일기를 드높이자고 선동한 것이다.

 

<이상 이계홍의 ‘실록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중 일부 인용>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이렇게 미국이 일본 정체성의 뿌리인 ‘천황제’를 인정하니 전후 처리는 유야무야되었다. 

히틀러의 자살, 이탈리아 파르티잔에 의한 무솔리니 처형과 달리 일본 왕은 미국의 양해로 거뜬히 생명을 부지했다. 전쟁 책임 소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왕은 쏙 빠지고 대신 하수인인 장수 몇 사람 목을 치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마저도 그들은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매년 제삿밥까지 받아먹고 있다. 최종 전쟁책임자의 목을 치지 않으니 이런 반역사성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고 사람들은 자유진영의 방어선을 치기 위해 미국이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사 그렇더라도 그것이 정의가 아니다. 헌데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적국 일본을 승리하자마자 우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소련과 함께 일본을 쳤는데, 승전하자마자 일본을 우방으로 대우한다? 최소한 1947년 8월 이전까지는 미국과 소련은 우방이었고, 일본은 적이었다.

√ 일본의 뛰어난 외교력, 일본을 살렸다

일본 패전을 구제받은 배경에는 일본의 뛰어난 외교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패전’을 구제받은 것은 일본의 외교력이었다. 일본이 일왕의 처형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일화들은 눈물겨울 정도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일본 국민성은 미국에 사정없이 꼬리를 내리고, 게이샤를 동원한 침대 정치에서부터 정치인, 외교관, 군수산업가, 자본가들이 총동원되어 외교전을 폈다. 단일대오, 오직 하나로 뭉쳐서 일본이 네토막되는 것을 막았다. 

일본은 연합국이 독일에서처럼 전‧후 4분할하기로 내부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홋카이도는 소련, 혼슈는 미국, 규슈는 영국, 시고쿠는 중국이 분할 통치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 외교가 막았다. 중국 내전 때문에 4대국 분할 통치에 중국이 나설 수 없다는 상황도 일본에게는 유리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는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의 단독 대일전이었다. 그러니 모든 의사결정은 미국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 아시아 각 국의 비극, ‘미국의 관용’이 잉태    

일본의 만행에 의한 아시아 각 국의 비극은 미국의 잘못에 의해 잉태된 측면이 크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은 4년이지만 이마를 맞대고 선린국으로 우정을 맺은 기간은 150년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을 할 때는 중국과 함께 일본의 인력이 많이 들어갔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태평양을 건너간 신진 유학파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이들이 전후 일본계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미국 군대 내에도 일본계가 많았다. 영어와 일본어를 아는 일본계 장교만도 만여 명을 헤아렸다(반면 한국은 선교사 출신 병사와 장교 기십 명에 불과). 

맥아더의 참모 중 일부는 일본계였고, 트루먼의 이웃도 일본인이었다. 특히 트루먼은 일본인 유학생과 함께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유럽 대륙의 전쟁과 판이하게 달랐다. 피를 보는 전투로 극도의 감정이 촉발되는 보병전 대신 피해 상황을 제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중전과 해상전 중심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프랑스군이 보병전을 벌이며 처절하게 피흘리며 죽고 죽이는 증오와 저주와 복수의 참혹상을 상대적으로 덜 느꼈다. 

여기에 언제 그랬더냐 싶게 막강 군대가 벚꽃이 지듯 한꺼번에 꼬리를 팍 내리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굴복의 태도는 미국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사무라이 정신으로 비쳐져 신선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세계적 강군이 절도있게 납작 엎드리는 것을 보고 미국은 승자의 아량과 관용을 고려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비극은 여기서 잉태된다.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아시아 각국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이 승전국 미국의 관용으로 없는 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나치군은 하급 장교까지 잡아 재판에 넘기고, 독일군 포로들도 가차 없이 척결해버린 유럽 국가와는 너무도 판이했다. 

√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 가까워진 미‧일 동맹

많은 사람들은 미‧소 대결 때문에 일본을 자유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일간의 동맹체제가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연합국의 2차대전 승리 이후에도 한동안 미‧소간은 우호국이었다. 두 나라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스탈린과의 개인적 친분도 있었지만, 공동의 적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함께 부순 우군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조는 트루만 대통령 집권 초반기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영국의 처칠 수상이 소련의 패권정치를 우려하면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소 냉전의 신호탄이 올랐다. 처칠은 1947년 6월 미국 미주리 주의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철의 장막'을 거론했다.

“철의 장막 뒤에는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옛 나라의 수도가 놓여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이 유명한 도시와 이곳의 주민들이 이른바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권에 있으며,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뿐만 아니라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통제에 묶여 있다.”

이 연설은 ‘평화의 핏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지만, 어느 순간 대결적인 ‘철의 장막'으로 둔갑했다. 처칠의 이 연설은 전쟁이 없는 평화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질서를 냉전구도로 몰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이 말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철의 장막'을 언급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처칠 발언 이후 한 세기가 다 되는 동안 세계는 냉전(cold war) 구도 속에 군비경쟁을 가속화했다. 그중 분단국인 우리가 전쟁까지 치르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 일본의 만행 묵과, 미국의 절대적 실책 

한국 분단 고착화는 미국과 소련의 산물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영향이 크다. 

일본을 패전국이 아니라 일본이 내세우는 이른바 ‘종전국’으로 인정한 태도 때문에 질곡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아시아 국가의 고통을 조금만 이해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 가설은 의미가 없다지만, 미국의 오판과 오만, 그리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세력들의 발호로 우리 역사는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미국이 남한에 진주한 직후 남한에는 역사적 격류가 있었다. 1946년 3차에 걸친 ‘대구 무장봉기(한때는 대구 폭동이라고 했다)’, 1948년 제주 4.3항쟁, 같은 해 여수순천 10.19 사건(한때  여순반란사건으로 명명되었다) 등은 모두 미군정 시기 일어났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그중 제주 4.3을 한 사례로 들어보자. 미군정은 주민의 항쟁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준동이라고 보고 군함을 배치해 해안을 봉쇄하고, 경찰과 우익청년단,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는 배후에 있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이념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경찰과 군이 합법적인 조사와 재판 진행 없이 주민을 체포해 즉결처분하고 마을을 휩쓸어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악명높은 경찰과 청년단의 막후에 미국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온 사람들이 이념 갈등을 부추겨 분열시키고 통치하는 전통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을 그대로 구사한 것이다. 

√ ‘친일‧친미파’, 한국사회 주류 등극  

35년간 일본 지배를 받는 동안 한국에는 독특한 생존의 존립근거가 마련되었으니 그것은 친일파의 삶이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한동안 숨죽이며 살았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인적ᐧ물적 자원을 공과를 따지지 않고 100% 이들에게 재배분함으로써 역사가 변질되었다. 

미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이 배제되거나 범인시되었다. 

역사의 순명을 따른다면 이들 세력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그런데 거부되었다. 물론 항일 독립투쟁가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는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도구로 차용했을 뿐, 대개는 민족주의였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순한 사회주의자였으며, 지식인의 기호품으로 달고 다니는 일종의 장식품이었다. 사조가 그랬다. 그래서 얼마든지 상호 적응할 수 있었고, 대화가 가능한 세력이었다. 

그런 그들을 일제 정책의 유산인 적대시 정책으로 척결의 대상으로 몰아가자 그들 역시 반동적으로 나왔고, 그것을 빌미로 공포의 경찰국가 체제가 70년 동안 유지되었다. 참혹한 일제 식민지 기간보다 두 배나 긴 세월이다. 

그런 적대시 정책의 우산 밑에서 일본-미국에 빌붙은 세력이 사회의 주류가 되고, 기득권층이 되고, 이후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기둥이 되었다. 

나라의 근본과는 상관없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표독성과 잔인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권 탄압과 반대세력 척결이라는 칼을 휘둘렀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된 지금도 그 그늘은 너무도 짙게 우리 내면에 드리워져 있다. 냉전 반공 대결의 황폐한 심리가 똬리를 틀었다. 민주주의를 수출한 미국이 역으로 독재 세력을 묵인하거나 지원한 결과다. 

√ 냉전‧대결적 정치, 70년 체제 뒷받침

사회학자 김동춘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단과 냉전이 한국인들의 사고를 한반도의 틀 내에 머물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은 물론 언론도 국제 뉴스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국제문제를 다루지 않아서 거의 모든 국민이 인류가 오늘 부딪친 문제, 지구의 환경위기나 분쟁과 갈등 등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이 없다."

구세력은 냉전적이고 대결적이고, 개혁세력은 통일 지향적이고 화해를 주장한다는 이분법적 재단은 사실 상투적이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피아를 가르는 기준점일 뿐, 통합을 끌어내는 데는 미흡하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와 통합은 독재세력과 친일세력이 반성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근래 더욱 표독스럽고 거친 모습을 보인다. 그럴 때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질 것인가. 특히 그 배후에 일본과 미국이 있다는 의구심에 다시 한 번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