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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 누가 점령군이고 해방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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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 누가 점령군이고 해방군인가 
  • 이계홍 주필
  • 승인 2020.02.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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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현대사 특강(3)] 1948년 해방 정국 나란히 진주, ‘오해와 진실’ 
미국과 소련 중 어느 나라가 진정 점령군이고 해방군일까.
미국과 소련 중 어느 나라가 진정 점령군이고 해방군일까.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1948년 해방 정국에 한반도에 나란히 진주한 소련과 미국.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가 해방군이고 점령군인지, 3편을 통해 밝혀본다. 

√ 미군보다 소련군이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배경

소련군은 미군보다 한달여 먼저 1945년 8월 9일 38선에 들어왔다. 소련군이 이같이 북한 땅에 들어온 것은 미국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미국은 만주 관동군의 위력에 놀란 나머지 소련의 참전을 간절히 요망했다. 미국이 제대로 정보만 갖고 있었다면 소련군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첫번째 비극이다.

미국이 소련을 대일전에 참가하도록 요청했던 것은 일본의 만주 관동군이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동군은 최대 100만 대군의 강군이었다. 규율이 엄하고 절도있고, 충성스런 관동군은 일본 황실에서도 혹시 역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내심 의심하고 있을 정도였다.

관동군이 최강의 군대라는 것은 일본의 작가 고미가와 준페이의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에도  나온다. 준페이는 1940년 만주 광산 노무관리로 일하던 중 소집 영장을 받고 입대해 관동군 보병으로 소만국경에 배치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을 발표했다.

‘인간의 조건’은 시베리아 추위보다 더 매서운 일본군의 기합에 시달리며 생과 사를 넘나드는 주인공 가지가 겪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전쟁을 겪은 일종의 반전소설이다.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위선과 비겁함, 잔인함, 포악성, 이기심, 나약함, 무가치함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중국인, 몽골인 종군위안부 얘기도 적지 않게 나온다(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존재를 부정한다). 모든 인간 군상이 전쟁의 도구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관동군은 강제된 강군으로서 무자비하고 비인간적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대서사 드라마다. 

√ 막강 만주 관동군 ‘진공상태’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단독 전쟁이었다. 미국은 진주만(하와이)을 기습 당한 뒤 본토 공략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때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든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이려고 외교력을 다했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미국은 일본 본토까지 치고 올라가는 데는 진격로가 너무 멀었다. 필리핀에서 호주까지 밀려난 미국은 공군력을 바탕으로 괌, 오키나와 남단까지 진격했으나 한반도 북방까지는 30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대신 소련은 불과 200km 내에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 만주 관동군은 진공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자 일본은 관동군 주력을 남태평양과 인도지나 반도, 중국 남부로 빼돌렸다. 본토 방어를 위해 6만의 군단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빼돌린 사이 만주는 항일 빨치산을 미행, 감시, 투옥하는 간도특설대와 첩보대 등 비전투 요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미국은 이 사실을 간과한 채 여전히 막강 군대가 만주에 포진하고 있다고 믿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참전을 애걸했다. 그것이 한반도 운명을 가른 변곡점이 되었다.

소련은 첩보부대를 통해 관동군의 주력이 남태평양으로 대부분 이동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베리아 벌판을 떠돌던 불량배들까지 동원, 군대를 긴급 편성해 소만국경에 투입했다. 소련 군대가 이북에 들어와서 주민의 시계를 빼앗아 줄줄이 팔뚝에 차고 다녔다는 것도 이런 불량배 군인을 대거 전선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이때 소련은 막강군대라는 일본군이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절도있고 용감한 일본군이 어느새 도망치기 바빴던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자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벌판을 휩쓴 뒤 1945년 8월 9일 함경북도 나진, 선봉, 청진, 웅기로 들어와 38선까지 내려왔다. 소련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38선에 머문 것은 미국이 38선에서 미소 양국 군대가 만나 승전의 축제를 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 한달 후 38선에서 만나 승전 팡파레를 울리며 승리의 미주에 흠뻑 취했다.

소련은 부산까지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같은 연합군인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38선에 머문 것이다. 또 부산까지 내려가봐야 전략적 이익이 있다고 보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만약에 소련이 약속을 어기고 부산까지 내려왔다면? 우리는 공산화되었을지 모른다. 정말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 미국과 소련, 한반도에 대한 인식 없어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지정학적 중요성도, 한반도에 사는 민족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로서 미국에 대항하는 또다른 일본으로 간주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방 이후 일본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한반도 국민을 인정한 것도 아니고,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 역시 한반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들이 한반도에 무관심했음을 드러낸 것 중 하나가 북한의 중심이 함흥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가 함흥에 공업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이 가장 흥청거리는 중심도시여서 그들은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격한 것도 조선의 해방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의 간곡한 요청과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을 비롯해 동북 3성을 장악한 일본 관동군 세력을 밀어붙이고 러일전쟁 때 잃어버린 사할린 4도 회복이 목표였다. 

38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들어왔다고 선언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대장 치스차코프의 포고문(1945.8)에 그 점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 ‘해방군'으로 다가선 소련, 치스차코프의 포고문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자!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고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

                           

1945년 8월

붉은 군대 사령부

√ 점령군임을 명시한 ‘미군 맥아더’ 

반면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 맥아더 총사령관 포고령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분명히 명시했다. 

맥아더 포고령 1호 

조선 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제국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 목적이 항복 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 하에서 시행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의 재산소유 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출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두 포고문만을 두고 보면 누가 점령군이고 해방군인가를 알 수 있다. 미국의 입장은 한반도는 일본의 부속품으로 인식하고,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를 접수했으니 당연히 승전국 군대의 노획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점령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소련군은 한반도는 원래 일본의 소유물이 아님을 전제로 해서 사태를 판단하고 있다. 

√ 1948년 북한을 떠난 ‘소련군’, 현재도 남아 있는 ‘미군’

소련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1948년 12월 25일 철수했다. 그에 반해 미국은 지금까지 이 땅에 주둔해있다. 

우리의 선각자들이 분열하지 않고, 냉철한 현실 인식 아래 ‘전략적 협상력’을 제고하는 등 지혜를 모아 한반도 주체로 나섰다면 분단을 막았을지 모른다. 무엇이 형성되기 전에 심혈을 기울여 잘 빚어내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치와 같다. 벌써 굳어버리면 새로 뜯어고치기 어렵다. 그리고 그 구조 아래서 이익을 챙긴 기득권 세력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타이밍과 기회라는 것이 역사에서 가장 중시하는 대목이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미영소 3국 외무상들이 모여서 2차 대전 전후 처리에 대한 회담을 가졌다. 흔히 모스크바 3상회의라고 부르는 이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소집된 것으로, 한반도 문제는 7개 의제 중 하나였다. 주 의제는 유럽 전후 처리이고, 한반도는 주변적인 의제였다. 

그런데 이 회의를 통해 우리는 엉뚱하게 찬반탁의 회오리에 빠지고, 좌우익 대결로 치달아 끝내는 점증해가는 양강 대결의 도구로 이용되고 말았다. 그중 모스크바 3상회의를 잘못 해석한 원죄가 크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10년 이상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내놓았고, 소련은 가능한 빨리라는 사족을 달아 5년 이내의 ‘후견인’ 역할을 제시했다. 이 기간동안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제거하기 위하여, 한국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한국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 완전한 오보

문면으로만 본다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은 ‘탁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라는 결정에 방점이 찍혔다. 선언적 레토릭이지만 성격 규정을 이렇게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한국 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한국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한국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①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탁치방안 작성 ②최고 5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한 뒤 ③신탁통치협정안을 미·소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는 수순이다.

다만 여기서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바라보는 지점이 다소의 견해차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강조된 ‘정치 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평등한 ‘도와줌’의 의미가 강조된 ‘협력·원조’의 의미로 해석했다. 명칭도 ‘탁치’와 ‘후견’으로 다르게 표기했다. 미국은 ‘보호(tutelage)‘라는 용어를 썼고, 소련은 후원 원조라는 뜻의 러시아어 ‘Опёка’로 사용해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수립을 미·영·중·소가 원조한다”고 표기했다.  

다시 말해, 소련안은 ‘선 임시정부 수립, 후 후견’을 골자로 한 데 반해, 미국안은 ‘선 탁치 후 정부수립’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어쨌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미·소간 타협의 산물이며, 어느 누구의 독단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상「3상회의에 대한 좌파3당의 대응」(이강수, 『한국근현대사연구』제3집), 「반탁투쟁과 자주적 통일민주국가건설의 좌절」(서중석, 『이영희선생화갑기념문집, 두레), 「반탁에서 찬탁으로: 남한 좌익진영의 託治觀 변화에 관한 연구」(심지연, 『한국정치학회보』, 제22집 2호), 『해방전후사의 인식 3』한길사) 등 인용>

그런데 동아일보가 엉뚱한 오보를 내 모스크바 3상회의가 왜곡되고, 남한은 찬반탁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3상 회의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오보가 그것이다. 신탁통치는 원래 미국이 주장한 것이며, 루즈벨트 대통령은 얄타회담에서 최대 30년까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도 10년을 주장했다. 반면 소련은 가능한 5년 이내로 수정안을 내, 5년으로 결정되었다. 

√ 또 외세 지배냐는 엉뚱한 정치 프레임

3상회의 결의문 제1항은 '임시 한국 민주주의 정부', 즉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제2항은 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그런 뒤 제3항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국 임시정부 및 미·영·소·중 정부와 논의해서 신탁통치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결정된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한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동아일보 보도를 보고 모두가 들고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한반도 주민은 또 외국 지배(신탁통치)냐는 저항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것은 정서적으로도 맞는 일이었다. 혹독한 일제 탄압을 받은 우리 민족은 지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이다.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 그래서 이승만 김구 제 세력이 모두 반탁 대오에 참여했다. 그리고 좌익 계열이 소련이 지향하는 찬탁 대오에 참여함으로써 좌우익 대오가 홍해 바다 갈라지듯 쫙 갈라졌다. 

소련은 찬‧반탁이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중시한 것인데 찬탁으로 오인되었고, 그 점에 있어선 미국도 마찬가지였으나, 국내에서는 반탁=애국세력=우익=미국, 찬탁=매국세력=좌익=소련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변질돼 백주 테러 등 폭력이 남한사회를 지배했다. 이때 친일 세력이 재빨리 보수 우익 대열에 참여했다. 찬‧반탁 대결은 친일을 세탁하는 좋은 피난처가 된 셈이다. 

“일제 식민통치를 막 벗어났는데 또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는 논리는 국민적 분노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우산 밑에서 보수 우익과 친일세력은 좌익, 또는 반대파를 제거해나가는 주요한 도구를 만난 셈이었다. 

민족세력을 자임한 반탁 세력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친미 사대를 신봉하는 또 다른 ‘친일세력’이 되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자산을 위탁하며 기생하는 한국의 보수 우익에 이끌려 가기도 하고, 때로는 좌우 대립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면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강대국의 세계 전략 등 큰 것을 보지 못했다. 조국의 내일을 내다보는 수준이 근시안적이고 정파적 이익만을 따지는 좁은 세계관으로 분단의 질곡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분열과 대립, 그리고 파괴. 이것이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역사의 유산이란 이렇게 모질고도 질기다. 

물론 주체적 이상을 펴겠다는 지도자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극단 세력의 거친 폭력에 버티지 못하고 끝내 좌절하고 도태되었다.

한편 10년간 4대국 신탁통치를 받은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 중립국으로 독립해 세계 선진모범국가로 발돋움했다. 이는 견해가 다른 제 정파들이 갈등을 조율하며 단합된 힘으로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결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이 지난하다고 보는 것은 외세 탓이라기보다 내부의 역량 부족과 분열상 때문이라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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