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미군정, ‘남한 독립운동 세력’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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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미군정, ‘남한 독립운동 세력’ 배제  
  • 이계홍 주필
  • 승인 2020.02.0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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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현대사 특강(2)] 한반도 효율적인 통제, 일본총독부 지속 활용 
사실상 점령군으로 입성, 친일파에게 권력 이양 모순 
일제 해방 후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 (발췌=민족문제연구소)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미군은 사실상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그로부터 한 달쯤 뒤인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그리고 9-10일 사이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 입성으로 미국의 실질적 남한 지배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38선 이남에 들어와 “승전군(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의 포고령대로 조선의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미군기와 전투기, 탱크의 엄호 아래 4만 5000명의 군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 ‘미 점령군’은 일제 경찰과 헌병의 손을 빌어 첫 임무를 수행했다. 일제 경찰과 헌병대는 환영 나온 인천시민을 향해 질서 유지라는 이름 아래 총을 쏘아 군중 2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마경찰에 의해 짓밟힌 환영군중, 채찍을 맞은 군중도 기백 명이었다. 해방군을 맞이한 조선 백성은 환영 나온 선물로 채찍질을 당한 셈이다. 

진압 경찰과 헌병대의 강압적인 태도는 미 태평양지구사령부의 지시 때문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 제국주의 헌병과 경찰에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남한의 치안을 계속 유지하고 행정기구를 존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8.15와 함께 우리는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지, 미군이 일본군과 경찰력을 동원해 치안권을 그대로 이행하라고 명령한 사실을 몰랐다. 

본래 일본은 8.15 패망의 날, 모든 재산을 내던지고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가려고 했다. 조선총독부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은 8.15 당일 아침,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여운형 위원장을 초치해 모든 행정권을 이양할테니 남한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다치지 않게 무사히 귀국하도록 허여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 해방 후 발빠른 정비, ‘여운형과 건국준비위’

민족지도자 여운형과 건준은 일제 패망 후 발빠른 건국준비에 착수했다. (발췌=민족문제연구소)

이에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전국을 통하여 정치범ᐧ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8~10월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훈련 조직하는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조선총독부 또한 일본인이 안전하게 철수하려면 치안권과 행정권 이양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이 같은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그리고 숨죽이며 무사귀환을 추진했다. 

여운형은 일제 치하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재빨리 건준 기구로 개편해 전국화했다. 남쪽은 여운형, 안재홍 등이 주축을 이뤄 건준을 조직했으며, 평양에서는 조만식, 현준혁 등이 38 이북의 건준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행정 이행절차가 진행되고, 건준의 청년대가 주요 행정기관, 방송국, 금융기관 경비에 나섰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항일 독립투사와 경제사범들도 석방했다. 

건준은 전국에 지부를 설치한 뒤 이를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로 전환했다. 전국은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치안 조직과 행정 조직을 재편성해 하나의 정부 기구가 수립되는 과정이었다. 충칭 임시정부가 들어오면 그들과 협의해 정부를 세우면 되는 일이었다.  

√ 미군 상륙과 함께 달라진 한반도 정국 

그런데 그로부터 약 한달 후 미군이 상륙하면서 일본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미 태평양사령부가 조선총독부더러 치안권을 계속 행사하라고 명령하고, 총독 정치를 이어가도록 용인하자 눈치 빠른 일본이 건준 및 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을 종전처럼 존치시킨 것이다. 해방이 되었어도 일제 총독 정치가 계속된 셈이다.

미국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해방 조국으로 들어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개인 자격으로 김구 주석, 이시영 부주석 등 1진 17명이 1945년 11월 23일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했다. 

2진은 외무부장 조소앙,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군무부장 김원봉, 내무부장 신익희 등과 장건상·김성숙·조경한 등 22명이 그해 12월 1일 김포비행장 상공에 이르렀으나 폭설이 내려 착륙하지 못하고 전라북도 군산비행장에 내려서 다음날인 12월 2일 서울로 들어왔다. 

금의환향해야 하는 임시정부의 환국은 이처럼 초라했다. 임시정부의 귀국이 초라했던 것만큼이나 임정의 앞길도 험난했다. 미군정은 의도적으로 임시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한편 이승만 박사는 이보다 한 달 앞선 1945년 10월 18일 역시 개인 자격으로 입경했다). 

√ 미군정, ‘조선총독부 조직’ 계속 활용

일제로부터 해방 초기 남한 정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은 철저히 조선총독부 관료와 군인, 경찰들을 행정 조직 일선에 투입시켰다.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 세력과 민족 세력 등 인사들은 배제되었다. 숙련된 행정 조직 활용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조선총독부와 미 태평양사령부가 깊숙이 협의한 끝에 내놓은 지배정책이었다. 

일본과 미 태평양사령부가 교신한 무전 내용을 보면 그들의 한국 지배정책이 처음부터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 일본과 미 사령부 교신, 어떤 내용 담겼나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과 미 태평양사령부 제24군 사령관이 교신한 통신문은 다음과 같다.  

△(1945)9월1일 일본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제24군 사령관 앞

 

“조선인 중에는 공산주의 혹은 독립운동자가 있는데, 이 기회에 치안을 어지럽히려고 계획하는 자가 있다. (일본)경찰력은 군대의 지원으로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다.”

 

△9월1일 미 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일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일본군은 미군이 그 책임을 인계받을 때까지 북위 38도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행정기관을 그대로 유지하기 바란다. 이를 위해 오늘 미군기가 조선인에 대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포고(전단)를 투하했다.” 

 

△9월2일 미 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일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어제 남조선에 투하한 전단(선전삐라)에 대해 조선인의 반향을 보고할 것”

 

△9월2일 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제24군 사령관 앞 

 

1. 1일에 투하된 전단에 대한 반도민(半島民)의 반향은 상당히 크며, 치안 유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산계 적색분자의 책동을 분쇄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2. 장래 이러한 종류의 전단 투하를 계속 희망한다. 미군의 진주까지 치안 유지의 책임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있으며 약탈, 폭력, 소요, 파괴 등을 행하는 자는 군율에 의해 처단된다는 점을 일반 민중에게 통고(전단 투하)하기를 바란다. 

 

<김종민의 ‘해방정국 친일파 상대한 미군정, 치안 맡은 일본군...비극의 씨앗’ 인용>

√ 남한 국민과 지도자, 해방 주체에서 배제 

남한 국민과 지도자들은 철저히 건국 주체에서 배제됐다. 

위의 교신 내용을 통해서 보듯, 한반도 운명은 한반도 국민과 상관없이 결정되었다. 

일본과 미군이 한반도 지배의 주체이고, 한반도 국민은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건준도, 상하이 임정도 부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저질러온 온갖 악행과 범죄 행위를 미국의 도움으로 깨끗이 세탁하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단순히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친일의 유산, 즉 모든 행정 조직과 자본(산업자본, 공장, 토지와 건물)을 고스란히 친일세력에게 물려주고 갔다. 

미군이 일본을 전후 관리의 카운터 파트로 삼은 것은 이해할만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패전 인수인계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본토를 해결하는 방식과 식민지 조선을 다루는 방법이 너무도 판이했다. 일본 본토는 송두리째 일본 정부에 전 권한을 물려주는 대신 한반도의 행정 조직과 공공재, 산업재 배분은 일본과 싸운 항일 민족세력, 또는 민족세력이 아니라 친일 사대 세력에게 물려주고 간 것이다. 

미국의 결정적 실책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국민을 배제시키고, 악명높은 일제 경찰에게 치안권을 맡기고, 자본 재배분 과정에서 친일세력에게 넘겨준 일이었다(반면 북한은 모든 자산을 압수해 국유화하고, 일본인은 맨몸으로 추방했다). 미군이 해방 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우리의 해방의 모순은 상당 부분 극복되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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