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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초 강당,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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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초 강당, 그것이 알고 싶다!
  • 김수현
  • 승인 2012.08.22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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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이야기]부강초 강당 설립 당시의 시대적 풍경을 조우하다

▲ 부강초등학교 강당

본지 제37호 1면의 ‘세종시, 편입지역 문화재 관리 허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강초 강당이 충북 문화재지정 철회 후 세종시 문화재지정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훼손과 화재 등에 대한 대책이 부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기사를 보고 전 부강초 총동문회장을 역임했고, 현 김종오 장군 선양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인 곽창록 옹(74)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강초 강당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갖고 있고, 기사가 실리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실려 있었다.

다음날 곽창록 옹을 찾았고, 곽창록 옹은 부강초 설립의 실증적인 자료인 ‘부강초 강당 설립의 실기(實記)’ 일본어 원본 현판(1937년), ‘부강초 강당 설립의 실기’ 한자어 현판(1949년), ‘부강초 강당 설립의 실기’ 한글 번역본, ‘부강초 강당’ 원본 현판 등을 제시하며 부강초 강당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에 대하여 설명했다.

▲ '부강초 강당' 원본 현판

곽 옹은 부강초 설립 당시에는 정부 지원없이 옛 서원과 같이 지역에서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모아 학교를 설립했다고 설명하며, ‘온고지신’과 같이 역사성 속에서 미래의 전망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부강지역의 역사를 정리해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 지역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곽 옹 세대의 몫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또한 세계적인 명품도시를 지향하는 세종시로 편입된 만큼 부강 역사의 우수성과 장점을 살려 ‘포구마을’과 같은 부강의 경쟁력 있는 미래 프로젝트를 구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향후 체계적으로 곽 옹과 오홍수 청주교대 교수, 향토사학자, 각 분야 전문가와의 인터뷰와 자료수집 등을 통해 부강 근대사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싣고자 한다.

우선 부강초 설립에 관한 사실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부강보통학교 강당 설립의 실기(實記)’를 옮긴다. 원문을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했고,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윤문했음을 알린다. 1930년대 전후의 부강사람들을 만나러 떠나본다.

▲ '부강초 강당 설립의 실기' 일본어 원본 현판(1937년)
▲ '부강초 강당 설립의 실기' 한자어 현판(1949년)

부강보통학교 강당 설립의 실기(實記)

청원군의 서쪽에 예부터 유명한 부강이 있어 1년사계절 팔경에 관람객이 모여들고, 금강 물위에 비치는 여러 산봉우리에 둘러쌓인 빼어난 별천지가 전개되는 태산의 터는 학이 노래하고 구름 속에 춤추는 자리로 유명하다.

산의 남쪽으로 위치한 이곳, 밭에 꽃이 만발하고 배움의 바다로 터를 잡은 곳은 우리의 모교 부강보통학교이다.

아침해가 떠올라 동창을 밝히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학교의 오른쪽, 푸른 기와 붉은 난간은 강당으로써 천년반석을 상징하게 한다.

이곳은 학부형들의 피땀어린 정성으로 이룩한 것이니, 신윤우 교감의 발의에 의하여 1918년 가을 본회를 창립하고, 윤수 회장의 취임 이래 꾸준한 정성의 저축으로 이루어졌다. 본교가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하게 된 것은 김태현 회장이 당선된 1923년이다.

1925년 이관현 회장 당시 강당 건축공사를 착수하여 다음해 10월 17일 완공하기에 이르기까지 총 공사비는 5,700원으로 그 중 2,700원의 부족액이 생겼을 때 나상규 회장 시대에 몇몇 사람과 우덕삼 씨의 특지의 기부금과 기타 여러분들의 찬조금을 가지고 이를 충당했다.

그 후 곽흥원 회장 때 이르러 사용되야 할 비용과 강당의 유지비가 곤란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오던 중 십오야 밝은 달이 다시 밝아오는 것과 같이 전서봉 씨의 1,000원의 희사를 필두로 김학현 씨 1,100원, 윤성길 씨 150원, 홍원표 씨 100원 등의 특지 기부가 있었다.

후에 윤성길 회장이 이를 기본 재산으로 정하여 보존상 영구책으로써 김·전 양씨의 토지 찬조제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본 회가 법인이 아닌 관계로 이전등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강당은 풍마우세로 퇴락해 많은 돈을 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하게 됐다.

1935년 봄, 앞에 기록한 토지를 기부 원액으로 맞바꿔 전서봉 씨가 회장이 됐을 때, 그 감독 하에 대대적으로 수리함과 동시에 그에 그치지 않고 전 회장은 일본인 다대노 교장과 협력해 여교원의 배치 및 학급증가 운동에 적극 매진했다.

한편 450원을 더 희사한 결과 이에 발맞춰 많은 사람들이 협조함으로써 사무실을 교실로, 강당을 사무실로 대용하는 금상첨화의 훌륭한 일을 이룩하게 됐다.

이에 이 사실을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해 뜻있는 한 선비는 부형회를 대표해 무딘 붓으로 본회 운영의 내용과 강당이 구축된 유래를 이 현판에 약술하는 바이다.

1937년, 부강공립보통학교부형회

*위 글은 일본어로 된 현판을 청주교대 오흥수 교수가 현대문으로 해석한 것임.

▲ 부강초 강당 설립 실기 탁본을 설명하는 곽창록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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