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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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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해야 돼요?”
  • 송길룡
  • 승인 2012.05.28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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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의 한 장면 (6)]경마장 가는 길(장선우, 1991)

밝은 대낮에 커피라도 한 잔 앞에 놓고 대화를 해보자고 할 때는 다른 건 몰라도 어쩐지 섹스는 대화주제로 올리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그것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적당히 환경이 주어지면 누구나 몇날며칠을 섹스 얘기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지경이다. 영화 역사의 중요한 한쪽 축에 섹스가 있다. 다행히도 영화관에서는 점잖은 체하지 않아도 된다. 전라의 육체가 넘실거리는 스크린. 옆좌석의 누구도 한층 달아오른 나의 얼굴을 놀리는 듯 쳐다볼 리 없다. 옆의 관객도 어차피 마찬가지일테니까.

객석의 조명이 꺼지면 일순간 상영관 내부는 암흑에 휩싸인다. 그때까지 주변에 보이던 다른 관객들의 존재는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가까이서 숨 고르는 소리나 잠시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상영이 시작되면 스크린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객석의 관습화된 약속이다. 이때 어둠에 감추어진 관객은 각각 혼자가 되는 느낌을 가진다. 그렇다. 혼자다. 같은 공간에 여럿이 있으면서도 관객은 저마다 홀로 영화를 본다.

영화는 혼자 관람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눈앞에 가득 펼쳐지는 네모진 큰 영상을 통해 혼자만의 은밀한 감정을 되새긴다. 그 은밀한 감정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섹스의 감정일 것이다. 섹스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의학적인 설명을 들을 일도 윤리적인 규범을 들을 일도 없이 바로 내가 느꼈거나 느껴보고 싶은 감정의 유희 그대로 스크린에서 겪어보고 싶은 것이 일반적이다.

<경마장 가는 길>은 여러 각도에서 음미해볼 내용적인 다채로움이 있지만 여타의 측면들을 제쳐놓고 무엇보다 섹스에 대한 그런 은밀함의 정서를 다시금 생각케 해주는 독특한 영화다. 1991년에 개봉된 영화를 고전영화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 이후의 급격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염두에 두면 1990년대란 어쩌면 먼 과거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지금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면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 R(문성근)은 프랑스에서 만나 동거생활을 했지만 먼저 귀국해 있는 여자 J(강수연)를 만나 줄기차게 섹스 요구를 한다. 프랑스에서야 남의 눈치 안보고 함께 지낼 수 있었겠지만 지엄한 결혼관습이 살아있는 한국에서는 섹스파트너와의 애정행각이 녹록치 않다. R은 요리조리 몸을 빠져나가는 J를 붙들어놓고 끈질기게 신경전을 벌이며 먼 외국에서의 환상적인 느낌을 되찾고 싶어한다.

인상깊은 한 장면은 이렇다. 드디어 R은 J를 모텔방에 데리고 와서 순순히 함께 침대에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R에게는 회심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J의 치마끈이 단단히 동여매어 있어서 풀기가 너무나 어렵다. 색정에 굶주린 남자가 욕실에서 라이터불을 켜서 어서 빨리 여자의 치마끈을 끊어보려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여자는 그 남자가 한심한 듯 나무란다. "꼭 해야 돼요?"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바에야 영화에서 그려지는 섹스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섹스에 대한 한 개인의 각별한 감정이다. 동시에 그 감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개인들이 속한 사회의 공통된 감정이기도 하다. 각자 숨기고는 있지만 섹스에 대한 속물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래서 관객에게 어떤 자성의 기회가 돼주기도 한다.

<경마장 가는 길>은 섹스를 환상으로 그려주지 않는다. 서로 질질 끌려다니다가 겨우겨우 서로의 살갗을 맞부딪치는 두 연인의 섹스를 보여준다. 섹스에 관한 한 그것이 더욱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진짜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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