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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친구... 아버님이 서울 탄광회사로 쫓아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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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친구... 아버님이 서울 탄광회사로 쫓아보내
  • 이성원(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
  • 승인 2012.05.24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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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곳을 찾아서 50년... 네번째 이야기

한평생 청소년선도와 사회계몽 운동을 해온 이가 있다. 꼬박 50년간이다. 연기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은 1960년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구현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다. 이 이사장이 청소년선도와 사회계몽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1960년 조치원역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6.25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고 호적도 없어 학교마저 들어갈 수 없는 ‘무호적자’를 위해 ‘호적갖기국민청원’을 하기도 했다. 세종포스트는 이성원 이사장의 청소년선도, 사회계몽 운동을 중심으로 연재를 한다. ‘시민참여 일간지’인 세종포스트는 이처럼 세종시민이 참여해 만드는 신문이다. <편집자 말>

거지들과 친구가 돼서 길거리를 함께 다니는 걸 보신 부모님이 큰 시름에 잠기셨다. 1960년대 당시 자유당 말기였다. 거지들을 모아서 농장이나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도록 도와주었는데, 아버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는 음식을 제대로 잡수시지도 않을 정도로 큰 걱정이셨다.

하루는 아버님이 나는 부르시더니,

다짜고짜 짐을 싸서 서울로 가라고 하셨다.
아예 기차표까지 사서 주시며 등을 떠밀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숙명여대 근처 남영동에 있는 한양탄광이었다. 탄광회사에 취직해서 서울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성북구 삼양동 산 111번지에 있는 ‘신생숙’이라는 사회학교에 계시는 김일남이라는 선배님을 만나러 갔다. 신생숙은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무료학교로서 대학생들이 선생님이었다. 대학생들이 시간 나는 대로 가르치다보니 온종일 학교를 지키는 선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일남 선배는 대뜸 "이 동지, 그렇잖아도 학교 선생이 많이 부족했는데, 잘 왔다"면서 도와달라고 반을 청하고 반은 강제로 말씀하셨다. 김 선배는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뜻을 펼치는 봉사 활동은 기회가 많지 않다"면서 거듭 야학교 선생을 하라고 강권하셨다.

나도 김 선배의 간청에 동의하고 잘 다니던 탄광회사를 그만 두었다. 물론 부모님과 상의도 드리지 않았다. 상의 드려야 분명히 반대하실 것 같아서 잠시 거역하더라도 야학교 교사는 옳은 길이라고 결심이 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꽤나 대우받았던 탄광회사를 그만두고 길거리를 배회하던 청소년들을 모아서 배움을 전해주는 월급 없는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조치원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조치원역에 도착하니 어떤 꼬마 거지가 반갑게 맞이하며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울에 가기 전에 꼬마거지들이었다. 행색을 보니 조금
깨끗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깡통을 들고 동냥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조치원에 있을 때는 깡통을 버리고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등을 했던 아이들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거지왕초들의 등쌀에 못 이겨 깡통을 들고 길거리로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를 보자 우르르 몰려들어 반갑게 맞이하며 깡통과 배낭에서 과일과 과자를 꺼내 주었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여객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때 마음 한 복판에서부터 뜨거운 게 북받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배고픔을 참고 동냥질한 것을 나에게 주는 꼬마 거지들의 웃음….

나는 또다시 결심했다. ‘어차피 내가 가야할 길은 돈 없고 갈 곳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보다’라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거지들과 생활이 시작됐다. 1960년 자유당정권 말기였다.

▲ 성북구 신생학교
▲ 신생학교 입학요강
▲ 신생학교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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