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은 분수 키우고, 기관장은 갑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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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은 분수 키우고, 기관장은 갑이 돼라”
  • 임동천
  • 승인 2019.05.0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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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문화연대 창립을 준비하며] <1>임동천 민예총 세종지회 이사
임동천 시인 | 계간지 ‘낮도깨비’ 편집장

‘팔 길이 원칙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1945년 영국은 예술평의회(Arts Council)를 창설하며 정치・관료행정으로부터 예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이같이 문화정책 원칙을 채택했다. 이러한 문화 행정의 출발점은 좀 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영국 정부는 영화위원회에 재정지원을 하며 영화제작 과정엔 일절 간섭하지 않고 창작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새로운 문화예술의 길을 다지기 시작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문화예술 행정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국민의 정부 때 ‘팔 길이 원칙’이란 문화정책을 표방했다. 새로운 세기의 문화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며 창작에 반하는 규제를 풀고자 했다. K팝, BTS가 그 결과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예술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까지는 먼발치에서 거대한 숲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술해 보았다. 이제 세종시라는 문화예술의 숲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의 시점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세종시문화재단이 설립될 때 개인적으로 긍정보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 서기 2000년 동안 이 땅의 문화예술정책은 늘 하향식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나 기관이 예산을 정하고 틀을 짜고, 활동 방향을 권장하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인식의 문제이지만, ‘결국, 또 하나의 상층부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똑바로 서!’란 말을 들으면 ‘지축이 23.5° 정도 기울어졌는데, 뭐가 똑바로지?’란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은 개인적으로 창작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관료사회와는 대척점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관료집단과 예술집단과는 기본적으로 23.5° 정도의 간극이 있다고 본다. 이 간극을 없애려 하는 쪽이 관료고 그 간극을 유지하자는 쪽이 예술이라고 본다면 ‘팔 길이 원칙’은 훌륭한 문화예술 행정이 아닐 수 없다.

세종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부정적이었던 생각이 해소되는 계기가 있었다. 재단 대표가 예술단체와 정기적인 대화를 하자고 제안을 했고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상향식! 말하자면 문화예술인들의 방향성을 듣고 소통하며 상향식 예술 행정을 지향하는 가교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재단 대표는 세종시의 모든 예술단체와 소통의 시간을 갖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부정이 흰색이고 긍정이 초록색이라고 가정한다면, 세종시 문화예술은 겨울을 지나 예술적 광합성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푸르렀다. 그땐 그랬다. 정말 그랬다. 딱 한 번,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예술가는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있다. 물론 예술적 자존감이 그 뿌리를 지탱한다. 행사장 VIP석에 앉아있는 인사들과 그 주변에 앉아 눈을 맞추고 속삭인다고 예술이 발전하거나 예술적 자존감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을 볼 줄 아는 인사가 있어야 문화와 예술은 발전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종시문화재단 팀장 중 한 분이 여러 예술단체와 많은 대화와 소통을 했다. 그나마 재단의 긍정적 요소였으나,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재단과 예술단체의 소통이 전무해졌다. 그 이유는 재단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봉건사회의 지주(권력)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마름(추수원)을 앞세워 추수기의 소작료 징수, 소작권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정된 권한을 준다. 이는 상호관계가 아닌 주종관계 유지를 위해서였다. 공모심사에 참여할 때 느낀 기분이 이랬다. 개인적으로 지역공모에 참여하지 않기로 다짐한 까닭이다.

21세기에 마름을 들먹이는 게 한심해 보일 수 있지만, 문화재단 직원의 다수가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보면 한심 정도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장막을 보는듯하다. 이분들이 재계약의 부담 없이 문화예술의 소명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왜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는가?
 
이제 왜 우리가 ‘세종시 문화연대’를 창립하려 하는지 이야기해 볼까 한다.

문화예술인들과 교류과정에서 문화 주체성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예술인이 예술의 뿌리가 돼야 하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 교류협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파파메이앙, 골드바니, 세븐틴, 퀸 엘리자베스와 같은 장미의 브랜드도 고유한 이름을 얻지 못한 들장미에서 시작됐다. 지역 문화예술의 뿌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행정 지원이 필요하다. 들장미가 브랜드로서 가치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정확히 문화예술은 상향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자체, 기관, 예술가 모두 이에 공감했으면 좋겠다.

단, 모든 단체는 이익단체로 변질하기 쉽다. 따라서 문화연대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팔 길이 원칙’이란 문화 행정의 출발점이 1세기가 지났다. 이 원칙이 아직 이 땅에서는 현실이 아니라 희망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지역예술인과 단체에 ‘분수를 지키는 대신에 분수를 키우라’고 말하고 싶다. 기관의 장에게는 ‘갑질하지 말고 갑이 돼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말은 공정하지 않을 때 적용하는 말이다. 공익을 사익으로 사용할 때 적용하는 말이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고 자치단체의 장을 투표로 선발한다. 당선된 단체장은 행정이 곧 재선 전략이란 말을 듣는다.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자리다. 단, 자신의 위치가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갑’일 것이고, 권력이라고 생각한다면 ‘갑질’일 것이다. ‘갑’은 존경의 대상이고 ‘갑질’은 질타의 대상이다.

자주 생각한다. 나는 작은 재주로 분수 떨고 다니지 않았는지. 그리고 분수를 키우기 위해 반성한다. 문학은 내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존감을 키운다.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과 두 팔을 벌려 크게 들숨을 채우고 싶다.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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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기 2019-05-03 13:48:03
문화재단이 문화를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문화 활동을 재단하려 든다면 이미 그 기능을 상실 했다고 봐야지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아직도 예술계에 미치고 있다는 현실에 우리의 갈 길이 아직도 험하구나 느낍니다. 어느 곳을 가나 문화재단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네요. 세종시는 그나마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습니다. 대화가 우선 이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면 행동이 최우선이죠. 자치단체장을 교체하는 것으로 해결 해야하지 않을까요? 변한 세상이라도 또 다시 블랙리스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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