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밤 천리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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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밤 천리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 이길구
  • 승인 2019.03.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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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의 중국 한시(漢詩)기행] <15>고적(高適)의 ‘제야작(除夜作)’

필자는 지난해 연말 중국여행을 갔다가 최근에 돌아왔다. 원래는 한 달간 여행할 목적이었으나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일정에 차질에 생겨 두 달 만에 겨우 귀국했다. 답사는 주로 당나라 시대 유명인사의 한시 관련 흔적을 찾아 자료를 찾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현재 연재하고 있는 ‘중국 한시기행’에 많은 보탬이 됐으면 한다.

이번에 소개할 시는 고적(高適:702~765)의 <제야작(除夜作)>이다. 우리말로 <섣달 그믐날 밤에>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달부(達夫)’이다. 그는 젊었을 때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산동(山東)과 하북(河北) 지방을 방랑하며 이백(李白)·두보(杜甫) 등을 친구로 삼았다.

고적(高適)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달부(達夫)’이다. 산동(山東)과 하북(河北) 지방을 방랑하며 이백(李白)·두보(杜甫)등을 친구로 삼았다.

어려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서민의 아픔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50세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고 구위(丘尉)에 봉해졌으나, 벼슬을 버린 후 하서(河西)로 찾아가 가서한(哥舒翰)의 서기가 되었다.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뒤, 회남(淮南)과 검남(劍南)의 절도사가 되었다. 감정이 분방하고 가슴에 품은 뜻을 그대로 드러낸 그의 시는 언어가 강하면서도 소박하고 풍격(風格)이 깊으면서도 호탕하다. 칠언고시를 잘 지었고, 불우한 심정을 표현하거나 백성들의 한(恨)을 슬퍼한 작품 등은 모두 감동을 주는 것들이다.

동북·서북 변경에 종군(從軍)한 적이 있어 당대 중앙정부와 소수민족과의 관계나 당군(唐軍) 내부의 폐단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시 속에 반영되고 있다. 그 가운데 〈연가행(燕歌行)〉은 웅장하면서 쓸쓸한 변방 요새의 풍경과 군인들의 고달픈 생활,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정신을 그린 작품으로 정조(情調)가 비장하다.

다른 작품으로 《고상시집(高尙詩集)》이 있다. 잠삼(岑參)의 시와 더불어 성당시(盛唐詩)의 대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 <제야작(除夜作)>을 알아본다.

여관한등독불면(旅館寒燈獨不眠)
객심하사전처연(客心何事轉悽然)
고향금야사천리(故鄉今夜思千里)
수빈명조우일년(愁鬢明朝又一年)
  
여관의 싸늘한 등불아래 홀로 잠 못 이루니
나그네 마음 무슨 일로 서글퍼지는가?
고향은 오늘 밤 천리 길로 생각되고
시름겨운 귀밑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 살 먹는구나.

<제야작(除夜作)>은 ‘섣달 그믐날 밤’으로,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707~765)이 천리타향의 낯선 여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이 시에서 제야(除夜)는 ‘섣달 그믐날 밤’을 말한다. 한등(寒燈)은 ‘차가운 등불’, 즉 ‘섣달 그믐밤에 타향살이하는 나그네 신세’로 보면 된다. 처연(悽然)은 ‘쓸쓸하고 구슬픔’이며 수빈(愁鬢)은 ‘시름겨운 귀밑머리’이다. 다른 판본은 수빈이 상빈(霜鬢:서리 맞은 귀밑머리)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명조(明朝)는 ‘내일 아침’, ‘다음 날 아침’이고, 우일년(又一年)은 ‘한 살을 더 먹다’, ‘또 한 해가 되다’라는 뜻이다.

이 시는 섣달 그믐날 밤,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707~765)이 천리타향의 낯선 여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내일이면 설날인데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객지에서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나그네의 슬픈 마음을 그렸다. 고된 타향살이 속에 흰머리만 늘어나는 착잡함이 더해진다. 다른 시집에는 ‘수빈(愁鬢)’이 ‘상빈(霜鬢)’으로 되어있는 점으로 보아 노년(老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침통한 데, 특히 변경에서의 외로움과 전쟁·이별의 비참함을 읊은 변새시(邊塞詩)가 뛰어나다. ‘변새시’는 변방의 풍경과 생활이나 종군하는 병사들의 고통과 향수를 주제로 한 시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중국 주변의 여러 민족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시기여서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어 피해가 극심하였다.

당시 시인들은 하층 관료로 있으면서 자주 종군(從軍)하는 부대를 따라 먼 변방으로 함께 가는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새로 접한 이국(異國) 풍물과 전쟁의 고통을 악부시(樂府詩)나 고시(古詩)의 형식을 빌려 지어내었다.

격식이 정제된 율시나 절구로는 변경 지방의 어려운 생활이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절실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새시를 주로 창작했던 시인으로는 장삼(岑參),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煥), 왕환(王翰), 최호(崔顥)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변새시(邊塞詩)’는 변방의 풍경과 생활이나 종군하는 병사들의 고통과 향수를 주제로 한 시를 말한다.

위 시의 작자인 고적(高適)은 지금의 티베트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753년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였던 명장 가서한(哥舒翰)의 막부(幕府)에 들어가 티베트지역의 토번(吐蕃)을 격파하여 구곡(九曲) 지역을 탈환하는 전투를 직접 목도(目睹)하게 된다. 그리고는 〈구곡사(九曲詞)〉라는 시로 칭송을 한 바 있다.

‘구곡’이란 지역은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파연현(巴燕縣) 일대로 목축하기에 적당했는데, 당과 토번은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각자의 통치 아래 두려고 자주 충돌하였다. 710년 당(唐)으로부터 이곳을 차지한 토번은 자주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단절시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고립시키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당을 더욱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753년에 이르러서야 가서한 장군이 토번에게 빼앗겼던 구곡을 모두 되찾았다.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던 때는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시절이었다. 당시 토번의 국왕은 송찬간포(松贊干布:617-650)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청장(靑藏)고원 내의 여러 장족을 통일한 후, 632년 지금의 중국 시장(西藏) 라싸에 수도를 정하고 토번 왕조를 세웠다. 그는 왕이 된 후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과 이웃 나라의 공주들과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토번의 국왕인 송찬칸포와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의 결혼식 장면.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장족(티베트족,藏族)과 한족(漢族)의 아름다운 혼사이다.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 일에 관해서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당시 송찬간포의 명(命)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녹동찬(祿東贊)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태종의 승낙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녹동찬이 장안에 갔을 때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목적으로 혼인을 청하기 위해 온 사신들이 많이 있었다. 태종은 혼인을 청하러 온 사신들에게 5개의 문제를 내고 정답을 알아맞히는 사람의 나라에 화친(和親)을 윤허(允許)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문제는 아주 가느다란 실을 가지고 구멍이 아홉 개 있는 명주(明珠)에 꿰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먼저 실을 개미허리에 매었다. 개미가 명주의 구멍으로 들어가자 실도 따라서 들어갔다. 성공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어미 말 백필(百匹)과 망아지 백필을 함께 놓아두고 어떤 망아지가 어떤 말의 새끼인지를 판별하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하루 동안 어미 말과 망아지를 분리해 놓은 다음 망아지에게 사료와 물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그들을 함께 놓아두자, 배가 고픈 망아지들은 각각 자기의 어미에게로 달려가서 젖을 빨았다.

녹동찬은 이렇게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나머지 관문도 하나하나 통과하였다. 제일 마지막 문제는 2500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 중에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단번에 그녀들 중에서 몸가짐이 가장 우아하고 단정한 공주를 식별해내었다. 이리하여 녹동찬은 마침내 다른 나라의 사신들을 물리치고 당 태종의 윤허(允許)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성공주는 원래 당 태종의 양녀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당 태종과 장손황후(長孫皇后)의 양녀로 궁궐에 들어가 깊은 사랑을 받으며 문성공주에 봉해졌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자기를 토번 족에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착잡하였다.

토번의 국왕 송찬간포와 결혼하여 두 민족이 대대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친지(親知)라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풍속도 전혀 다른 먼 이역(異域) 땅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그러한 문성공주를 위해서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는 각종 가구・그릇・패물・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문학・각종 기술 서적 및 의약품・곡물・누에알 등도 있었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동불상(銅佛像)도 함께 가져갔다.

당시에 토번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문성공주는 실제로 이러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중국 역사상 왕소군(王昭君)에 이어 두 번째로 화친(和親)의 임무를 띠고 이역 땅으로 시집간 여인으로 기록되었다.

641년 당태종은 예부상서인 이도종(李道宗)으로 하여금 16세인 문성공주를 호위하여 티벳 라싸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이 결혼으로 당과 토번 사이에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전쟁이 드물어지고 상인들과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실제로 필자는 이번 여행에서 사천성(四川省) 동티베트 주변을 유람하였는데 곳곳에 문성공주에 관한 동상과 함께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단순히 티베트족에 시집간 공주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대상이 되는 하나의 신(神)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티베트불교 사원에 가면 문성공주를 형상화한 보살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문성공주 묘(廟)는 청해성(靑海省) 옥수시(玉树市) 일월산(日月山)에 있는데 ‘대일여래불당(大日如来佛堂)’이라고도 불린다.

멀게만 느껴졌던 티베트도 북경에서 서안을 거쳐 라싸로 가는 청장(靑藏)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젠 중국 전 지역에서 티베트 여행이 쉽게 되었다. 1300여 년 전 문성공주가 실마리를 푼 중국과 티베트 간의 왕래와 우호가 새롭게 중국인들에게 다가서게 된 것이다.

춘절의 역사는 은상(慇商) 시기 새해 벽두나 연말에 진행되던 신이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행사에서 기원했다. 고대의 춘절은 <원일(元日)>, <원단(元旦)>, <신년(新年)>이라고 했다.

중국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正月初一)는 춘절(春節)로서 ‘음력(陰歷)’ 또는 ‘농력(農歷)’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중국의 민간에서 가장 성대하고 오래된 전통적인 명절이다. 춘절의 역사는 고대국가 은상(慇商) 시기 새해 벽두나 연말에 진행되던 신이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행사에서 기원됐다. 고대의 춘절은 <원일(元日)>, <원단(元旦)>, <신년(新年)>이라고 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야 정식적으로 음력 정월 초하루를 ‘춘절’이라고 정했다. 기나긴 역사는 춘절민속 내용을 매우 풍부히 했는데 춘련(春聯)이나 연화(年畵), 복(福)자 붙이기, 창문에 종이오림 붙이기, 설 떡 찌기, 물만두 빗기, 폭죽 터뜨리기, 섣달 그믐날 밤새기, 새해 세배 등의 풍속은 지금까지 성행하고 있다.

중국에서 섣달그믐 날과 춘절은 가장 특색 있는 명절이다. 여기에는 유구한 역사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당나라 시인 고적은 <제야작(除夜作)>에 이어, 설날에 지은 <원일(元日)>이라는 시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옥수금의취우(玉樹錦衣翠羽)
방준계주숙장(芳樽桂酒椒漿)
헌세배경앵무(獻歲杯傾鸚鵡)
명춘운잡생황(鳴春韻雜笙篁)

백화나무, 황금빛, 옷, 푸른 깃털
향기로운 술잔엔 계수나무 술, 산초나무 술
새해에 앵무새 기울이니
봄맞이하는 생황 소리 어지럽다.

이 시는 부귀한 가정에서 보내는 설날의 모습을 묘사했다. 앞의 두 구(句)에서는 여섯 개의 명사를 써서 화려한 의복, 기물을 묘사했다. 뒤의 두 구에서는 술잔을 기울이고 악기를 연주하며 설날을 맞이하고 있다.

계주(桂酒)와 숙장(椒漿)은 모두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술’이다. 앵무(鸚鵡)는 ‘술잔이름’을 말하는데 ‘해하배(海螺杯)’ 라고도 한다. 광동 남쪽에서 원주민들이 소라껍질을 깎아 술잔 형태를 만든 다음, 금은으로 술잔다리를 칠했는데 이를 ‘앵무배’라 한다.   

필자는 2019년을 맞아 뜻하지 않게 중국에서 제야(除夜)와 설날을 보냈다. 그곳에서 폭죽도 터트리고 만두를 먹으며 춘절을 지냈다. 지역마다 소수민족마다 각각 풍습은 달랐지만, 춘절은 중국에서는 최대의 명절이었다. 공식적인 설날 연휴는 일주일이었지만 보통 보름에서 한 달간 연휴를 보내는 곳도 많았다. 그들은 설날에서 대보름까지 고향에서 가족들과 풍습과 놀이를 즐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필자 이길구는 한문학 박사다.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산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계룡산과 실크로드에 대한 많은 저술을 출판한 바 있다. 현재는 한시(漢詩)에 관심을 두고 연구 활동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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