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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서당이 키운 애국지사, 횃불로 타오른 장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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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서당이 키운 애국지사, 횃불로 타오른 장기민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9.02.05 0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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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③세종시 독립운동가의 자서전 <장기민 편>

올해는 3·1운동, 임정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출범 8년 차에 접어든 세종시도 지역 역사와 특색을 살린 4개 분야 32개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과거 충남 연기군에서 대한독립을 외치고 세종시에 자취를 남긴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일제의 국권 찬탈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홍일섭 선생, 전의면 첫 만세운동 현장에 있었던 청년 이광희 선생, 투철한 항일의식을 보여줬던 장기민 선생이다.

국가보훈처 자료와 2012년 세종문화원에서 편찬한 향토 사료를 참고해 당시 충남 연기군의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 3인의 기록을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편집자 주>

① 세종 조치원 만세운동 선봉장, 관직 내던진 홍일섭 선생

② 세종시 첫 만세운동, 25세 청년 이광희도 있었다

③ 문중서당이 키운 애국지사, 횃불로 타오른 장기민 <끝>.

세종시 연동면에 위치한 육영재 출입문 모습. 장기민 선생은 1919년 3월 28일 주민들을 모아 횃불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사진=독립기념관)

송곡 장기민(張基民). 1897년 3월 17일 충남 연기군 동면에서 태어났다. 내 본관은 결성(結城)이다.

내가 태어난 동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조치원, 남면과는 미호천을 사이에 두고, 금남면과는 금강, 충북과는 아미산을 경계로 붙어있다.

연기군에 결성장씨가 처음 들어온 곳은 전동면 노장리였다. 이후에는 동면으로 퍼져 3대 대성(大姓)에 속할 만큼 번창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39호로 지정된 육영재는 결성장씨의 문중서당이었다. 육영재는 송룡마을 북쪽 송담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송동서숙, 송남서당으로도 불렸다.

조선 말에는 개화기 신식학문을 교육하는 기성학교를 개설해 초·중·고 과정을 교육했다. 나와 친척 형제들은 태어나 이곳에서 줄곧 학문을 익혔다.

내가 10대 때 육영재를 이끌었던 장성휘(張星輝) 큰 스승은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다 고향으로 낙향했다. 대성학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이념을 가지고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다.

육영재에서 배웠던 국사교재도 대성학교에서 사용했던 ‘대조선사(大朝鮮史)’였다.

나는 두 살 어린 아우 장홍진과 마음이 잘 통했다. 육영재에서 민족 교육을 함께 받아 둘 다 평소 애국심이 깊었다. 1919년 3월 연기군 동면 만세운동을 함께 주도하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곳 연기군에도 확산됐다. 내가 23세, 홍진은 21세 때 일이다. 당시 연기군수는 혼란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각 면을 순회하며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홍진과 나는 현장에서 “한국 민족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이 말을 들은 면장은 우리 둘을 제지했다.

군수 연설에서 돌아와 평소 뜻을 같이하던 홍진과 함께 즉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거사는 1919년 3월 28일 밤으로 정해졌다.

전날인 27일에도 동면 예양리, 노송리, 송룡리 등 여섯 군데에서 횃불과 함께 군중의 만세 소리가 들끓었던 터였다. 조치원 헌병이 출동해 주동자 8명이 체포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동네 면민들을 모았다. 10여 명이 모였다.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송룡리 산 위에 모닥불을 밝혔다. 나는 횃불을 들고 시위대 선봉에 섰다. 뜨거운 불길에 담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새벽 밤공기를 타고 마을로 퍼져나갔다.

나와 홍진은 그 자리에서 헌병에게 체포됐다. 내가 체포된 이튿날 29일 전동면 청송리에서는 동민 약 20여 명이 내동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치원과 서면도 마찬가지였다. 연기군에서는 3월이 지나 4월이 넘어서도 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됐다.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모진 고문의 여독은 컸다. 형을 모두 살고 나왔으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장기민 선생과 장홍진 선생의 판결문. 왼쪽 하단에 두 사람의 이름이 한자로 쓰여있다. 장기민 선생은 1919년 4월 7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2021년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국가보훈처)

<사망 그 후> 장기민 선생은 1921년 2월 24일 25세의 이른 나이로 순국했다. 옥살이를 하면서 건강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장기민 선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장홍진 선생도 같은 날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그는 1938년 5월 3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기민 선생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장홍진 선생은 애국지사 제1-1묘역에 묻혔다. 

두 사람이 함께 공부했던 육영재는 독립기념관 국내항일운동사적지로 등재됐다. 1876년 현재 자리로 이전한 뒤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 7-2에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100여 년 역사를 가진 연동고등국민학교의 전신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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