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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첫 만세운동, 25세 청년 이광희도 있었다[3·1운동 100주년 특집] ②세종시 독립운동가의 자서전 <이광희 편>

올해는 3·1운동, 임정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출범 8년 차에 접어든 세종시도 지역 역사와 특색을 살린 4개 분야 32개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과거 충남 연기군에서 대한독립을 외치고 세종시에 자취를 남긴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일제의 국권 찬탈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홍일섭 선생, 전의면 첫 만세운동 현장에 있었던 청년 이광희 선생, 투철한 항일의식을 보여줬던 장기민 선생이다.

국가보훈처 자료와 2012년 세종문화원에서 편찬한 향토 사료를 참고해 당시 충남 연기군의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 3인의 기록을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편집자 주>

① 세종 조치원 만세운동 선봉장, 관직 내던진 홍일섭 선생

② 세종시 첫 만세운동, 25세 청년 이광희도 있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 출신 이광희 선생 묘지에 설치된 공적 기념비. 이 선생은 25세 청년으로 전의 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895년 5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이름 이광희(李光熙). 내가 25세 되던 해 3월, 전의면민들은 일제에 대해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으로부터 촉발된 독립 열망은 이곳까지 번졌다. 연기군 첫 만세 시위도 바로 이곳 전의면 읍내리 전의장터에서 시작됐다.

3월 8일, 이수욱 형님은 나와 이장희, 정원필을 찾아왔다. 접선지는 김병오의 집. 함께 거사를 추진하자고 결의했다.

나보다 5살이 많던 29세 이수욱 형님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올라갔다가 3.1 운동을 목격했다. 3월 6일까지 경성에 머물다 7일 귀향해 전의면 만세 운동을 기획했다. 그날밤 바로 신정리 박성교의 집에서 추득천, 윤자벽, 윤상원, 윤자훈, 윤상억, 김재주 등과 만났다.

날 찾아온 건 이튿날인 8일이다. 거사날은 전의시장 장날인 13일로 정해졌다. 이 형이 제작한 목판으로 태극기 150본을 만들었고, 선언서를 써서 준비했다.

거사일인 3월 13일 오전 9시, 전의시장으로 가는 통로인 신원리 갈정마을 고개에 나가 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국기를 나눠줬다. 태극기를 옷 속에 감춰가도록 했다. 이수욱 형님의 연설이 끝나면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주창할 것을 일일이 제의했다.

이날 오후 12시 40분.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전의시장에서는 수백 명의 장꾼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나도 옷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냈다.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과 함께 읍내를 행진했다. 이 발걸음은 전의역과 우편소를 지나 현재의 전의초등학교까지 이어졌다.

곧이어 헌병과 조치원에서 급히 출동한 철도원호대원 20명이 출동했다. 거사를 주도한 이수욱 형님과 나를 포함해 총 8명을 붙잡아 가뒀다. 수감된 나머지 여섯은 이수욱, 추경춘, 추득천, 윤자벽, 윤상원, 이장희, 이수양이다. 현재의 세종시 땅에서 일어난 첫 3.1운동이었다.

독립 애국지사 이광희 선생은 1919년 3월 13일 연기군 첫 만세 운동으로 기록된 전의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날 현장에서 붙잡혀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사진은 당시 판결문으로 맨 오른쪽 하단 한자로 이광희(李光熙)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자료=국가보훈처)

전의 만세운동의 열기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틀 후인 15일 전동면으로 퍼져나갔다. 이웃마을 전동에서도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벌였다. 

나는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수욱 형님은 1년 6월형을 받았다. 죄명은 조선형사령 제42조, 보안법 제7조 위반. 만세 운동에 쓰였던 태극기는 형법 제19조에 의해 몰수됐다.

곧바로 함께 재판부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돼 형을 모두 살고 나왔다. 

<사망 그 이후> 이광희 선생은 1943년 8월 1일,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독립을 2년 앞둔 때였다. 정부는 이광희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현재 이광희 선생은 몇 번의 이장을 거쳐 고향인 세종시 전의면 신정리 선산에 묻혀있다. 전의산업단지 개발로 묘를 선산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진다. 이광희 선생의 손자 이화종 씨는 여전히 신정리에 거주하며 그가 묻힌 선산을 돌보고 있다. 이 씨는 최근까지 신정리 이장직을 12년 간 지냈다.

묘 앞에는 그의 애국심을 기리는 추모비가 남아있다. 세종시는 지난해 12월 이곳에 이광희 선생의 공훈이 담긴 기념비를 설치하고, 인근 500m, 150m 길목에 각각 이정표를 설치했다.

이광희 선생의 손자 이화종 씨가 이 선생의 묘 앞에 세워진 기념비를 쓰다듬고 있다. 현재 이화종 씨는 선산 근처에 거주하며 이 선생의 묘를 돌보고 있다.
세종시 전의면 신정리 이광희 선생의 묘 근처 길목에 설치된 이정표. 세종시는 지난해 12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적 기념비와 이정표를 설치했다.

한지혜 기자  wisdo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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