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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치원 만세운동 선봉장, 관직 내던진 홍일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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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치원 만세운동 선봉장, 관직 내던진 홍일섭 선생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9.02.0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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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①세종시 독립운동가의 자서전 <홍일섭 편>

올해는 3·1운동, 임정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출범 8년 차에 접어든 세종시도 지역 역사와 특색을 살린 4개 분야 32개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과거 충남 연기군에서 대한독립을 외치고 세종시에 자취를 남긴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일제의 국권 찬탈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홍일섭 선생, 전의면 첫 만세운동 현장에 있었던 청년 이광희 선생, 투철한 항일의식을 보여줬던 장기민 선생이다.

국가보훈처 자료와 2012년 세종문화원에서 편찬한 향토 사료를 참고해 당시 충남 연기군의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 3인의 기록을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편집자 주>

① 세종 조치원 만세운동 선봉장, 관직 내던진 홍일섭 선생

1919년 3월 당시 충남 연기군 조치원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한 홍일섭 선생 추모비 앞에 설치된 기념비. 그는 만세 운동 당일 붙잡혀 끝까지 저항하다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정부는 1990년 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나, 홍일섭(洪日燮). 1878년(고종 15년) 12월 5일, 현재 세종특별자치시가 된 연기군 서면 신대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병규(洪秉揆),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9세에 모친을 여의고 13세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92년 (고종 29년) 고향을 떠나 전북 고산의 명망 높은 유학자인 고진병(高鎭炳)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은 것은 이때부터다.

1890년대 조선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며 민심이 횃불처럼 일어났고, 같은 해 갑오개혁, 을미사변을 겪으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청나라와 일제의 침략은 사회문화의 충돌과 함께 보통의 농민들을 굶주림으로 이끌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되던 해 혼인을 올렸다. 과거 공부에 매진했다. 1906년 궁내부 시험에 합격해 장례원 장악과주사(掌樂課主事)에 임명됐다. 장악과는 대한제국(1897~1910) 시절 궁중음악을 관장한 음악기관이다. 1911년 아악대로 개칭됐다.

이후에는 역사 기록·편찬 업무를 담당한 각궁 기사관(記事官)을 역임했다. 1907년,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 역할을 했던 시종원주사(侍從院主事)로 승진해 고종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시종원은 임금의 비서기관으로 어복(임금의 복장), 어물(임금의 물품), 진후(병 진단), 의약(치료)을 관장했다.

외교권을 뺏긴 조선의 국력은 날로 쇠퇴했다. 궁내에는 일본에 협력해 조선을 팔아넘기려는 친일 대신들이 득세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치욕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분통을 금치 못했다. 1913년 공직을 사임하고 고향 충남 연기군으로 돌아왔다. 관직에 진출한 지 7년 만이었다.

외세에 의해 주권을 잃고, 나라까지 뺏긴 원인을 골몰했다. ‘교육’이었다. 혹독한 역사의 배경에는 교육이 있었다. 낙향한 후 오늘날의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내 나이 42세. 독립을 외치는 만세 물결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민족 대표 33인으로부터 시작된 독립 열망은 충청도로 퍼졌다. 동지들과 함께 공주와 청주, 천안 등지에 독립선언문과 항일격문을 살포했다.

대망의 3월 30일, 조치원 장날을 기해 기획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달 초 시위에 참가했던 조치원청년단 맹의섭, 김재형, 이은식, 전병수, 김규필, 천종구와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장례식 참여차 상경했다가 거사를 시작했다.

30일 오후 2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운동이 시작됐다. 나는 수천 명의 장사꾼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민들은 더 큰 후창으로 답했다. 시장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장꾼들과 읍민들의 목소리는 연기청년회원들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군중을 인도했다. 곧이어 조치원 헌병과 주둔 수비대원들이 출동해 총개머리로 군중을 난타했다.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 김규필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구타당해 우선 피신시켰다. 전병수는 머리 앞뒤를 총개머리로 맞아 중상을 입었다. 붙잡혀 끌려간 이들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하지만 각 부락에서는 연일 밤새 횃불 시위가 이어졌다.

함께 체포된 동지 중에는 “다시는 만세를 부르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풀려난 이들도 있었다. 주동자였던 나는 끝내 이를 거부하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죄명은 ‘국가 보안법 위반’. 조선형사령 제42조와 보안법 제7조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뜻밖에도 형무소에서 같은 문관 출신이자 의병장을 지낸 지산 김복한 선생과 조우했다. 감회가 남달랐다. 형을 마치고 1921년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적지 않은 나이에 옥살이를 하면서 고질병을 얻었다. 공직을 던지고 만세 운동의 선봉에 서기까지, 다사다난한 삶이었다. 

홍일섭 선생이 옥중에서 보낸 엽서. (자료=독립기념관)

<사망 그 이후> 홍일섭 독립유공자는 향년 58세, 1935년 6월 14일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원하던 조국 광복은 보지 못했다. 

광복 이후 1978년 2월 26일 홍일섭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홍 선생의 높은 애국정신을 선양·기념하기 위해 1978년 11월 28일 주민 성금, 지방비 예산을 모아 묘역 정리 사업이 추진됐으며 기념비도 건립됐다.

국가보훈처는 1983년 8월 31일 홍 선생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이어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 국립현충원으로 묘가 이장되면서 지정 해제됐다.

기념비는 고향인 세종시 연서면 신대2리 성적골 인근에 위치해있다. 세종시는 지난해 12월 홍일섭 선생의 기념비 앞에 독립유공자를 알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인근 길목에 이정표를 설치했다.

2009년 5월 20일 홍일섭 선생의 손자 홍종백 씨 등 후손들은 그의 유품 250여 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기증품에는 홍 선생이 궁 관직 생활 당시 입은 관복과 공주형무소 수감 시 보낸 옥중엽서 등이 포함됐다.

홍일섭 선생은 연기군 조치원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 사진은 당시 판결문. (자료=국가보훈처)
홍 선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됐지만 기념비는 여전히 고향 연서면 신대리에 남아있다.
홍일섭 선생이 1906년 관직에 진출한 후 제례 시 입었던 관복(왼쪽)과 1909년 순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남서순행 기념장(오른쪽). 2009년 5월 20일 후손들이 직접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사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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