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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세종시 3.1운동, 그 39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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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세종시 3.1운동, 그 39일간의 기록
  • 이충건 기자
  • 승인 2019.01.22 15: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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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시장·부강역 시위에 수천 명 참여, 동시다발 횃불시위까지… 세종시, 독립유공자 포스터 제작
세종시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포스터를 제작한다.

[세종포스트 이충건 기자] 올해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다.

세종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포스터 제작에 나섰다.

22일 세종시에 따르면, 지역에서 일어난 시대별 만세운동 역사,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들의 활동 경로와 내용 등을 표현하는 포스터를 구상 중이다. 독립운동의 주역은 물론 무명의 유공자를 발굴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세종의 독립운동은 농민이 주도해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전의면을 시작으로 동시다발적인 횃불 만세운동을 39일 동안 활발하게 전개했다.

시는 인물소개와 활동내용 등 독립운동의 스토리를 담아 포스터를 제작할 예정이며, 2월 말부터 온·오프라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홍보할 계획이다.

다음은 국가보훈처 기록으로 살펴본 세종시 3.1만세운동의 역사다.

#1. 1919년 3월 13일 낮 12시 40분. 충남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전의시장. 수백 명의 장꾼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시장을 누볐다. 그러자 헌병과 조치원에서 급히 출동한 철도원호대원 20명이 합세해 주동자 8명을 구금했다. 지금의 세종시 땅에서 일어난 첫 3.1운동이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다. 신정리 주민 이수욱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 6일 귀향해 같은 마을 추경춘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알렸다. 이어 7일 밤 동리 박성교의 집에서 추득천, 윤자벽, 윤상원, 윤자훈, 윤상억, 김재주 등과 13일 거사를 합의했다. 8일 밤에도 김병오의 집에서 이장희(李章熙), 이광희(李光熙), 정원필(鄭元弼)과 만나 뜻을 모았다.

이수욱은 목판으로 태극기 약 150매를 만들어 거사 당일 전의시장 통로인 신원리 갈정마을(葛井洞) 고개에서 사람들에게 국기를 나눠주고 옷 속에 감추어가게 했다. 이수욱은 시장에 이르러 군중에게 일장연설을 한 후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했고, 이수양을 포함한 군중들이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이날 일제에 체포된 만세 운동 주동자는 이수욱, 추경춘, 추득천, 윤자벽, 윤상원, 이장희, 이광희, 이수양이다.

이틀 후인 15일 전동면에서도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벌였다.

#2. 1919년 3월 23일 금남면 대평리(大平里)시장. 장이 선 이날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워 만세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이날 시위는 임헌규가 제안하고 임병주, 이덕주, 김봉식, 임순철, 임헌빈 등이 주동했다. 임헌규는 선두에서 지휘하다 적의 구타로 빈사 상태에 빠져 체포를 모면했지만, 치료를 받던 중 피검돼 옥고를 치렀다. 대평시장에서는 4월 2일 2차 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 헌병에게 8명이 체포됐다.

세종시에서는 곳곳에서 주민들이 횃불 만세운동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였다.

#.3. 3월 23일 대평시장 만세운동에 이어 같은 날 밤 북면(현재 조치원읍)·서면·남면 3개 면 10여 리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횃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청주 사람들이 밤 9시부터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치원으로 내려오자 조치원과 주변지역 군중이 연대해 벌어진 시위가 커졌다.

이날 밤 시위에 이어 연기군에서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전체 7개 면 중 5개 면에서 연달아 횃불을 올렸다.

3월 26일 동면 응음리 동민들은 고목골 뒷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운동은 청주군 강내면 사곡리민과 연락해 이뤄졌다. 북면에서는 밤 8시께부터 횃불시위를 하다가 청주군 강내면 등의 횃불시위대 수천 명과 합세해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3월 27일 동면의 예양리․노송리․송룡리 등 6곳에서도 횃불과 함께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예양리 의거는 구장 장재기가 주도했고 노송리와 송용리는 청주군 강내면민과 연락하며 전개됐다. 이날 밤 헌병이 출동해 8명이 체포됐다.

3월 28일에는 동면 송룡리 주민 10여 명이 동리 산 위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날 횃불시위 주동자는 장홍진과 장기민이다. 이들은 이날 민심 무마를 위해 동면사무소를 방문한 연기군수에게 “한국 민족이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면서 시비가 일자 돌아와 동민들과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헌병에게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3월 29일 전동면 청송리에서는 동민 약 20명이 동리의 내동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 만세를 절규했다. 주동자 권혁기는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조치원읍에서도 매일 밤 횃불시위가 계속됐다.

3월 30일 서면에서는 동시다발적인 횃불시위가 일어났다. 기룡리에서는 유진광의 주도로 주민 대다수가 뒷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유진광은 이 일로 징역형을 받았다. 3월 31일 밤 북면에서는 면내 각 리에서 산 위에 횃불을 놓고 만세를 연호하며 기세를 올렸다. 남면에서도 각 동리가 횃불시위를 벌였다. 방축리는 밤 8시께 30여 명이 황우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목이 쉬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했다. 주동 인물 임헌상은 체포돼 태형을 받았다. 복통리는 밤 8시께 동리민 약 10명이 동리 뒷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 박원칠이 주동 인물로 지목돼 옥고를 치렀다.

같은 날 밤 양화리, 진의리, 송담리 등에서도 각각 횃불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운동은 진의리 김봉식, 월산리 임영복, 양화리 조의순・임덕문이 이덕민의 집에 모여 거사에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은 양화리 임덕화를 앞세워 100여 명과 함께 아월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진의리 임영철을 앞세워 동리 산으로 옮겨 횃불을 놓았고, 다시 송담리로 넘어갔다. 이미 그곳에서는 횃불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송담리 시위대와 합세했다. 그 결과,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 이덕민 등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4월 1일 남면과 송담리에서 전날에 이어 횃불시위가 있었다. 밤 9시께 서운산에서 약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작된 송담리 시위는 1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 시위는 임희수의 발의로 임숙명, 임만수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체포돼 태형을 받았다. 갈운리에서는 약 150명이 황우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만세를 고창했다. 이밖에 전의면․전동면의 각 부락에서 횃불시위가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치원시장과 부강역 앞 광장 만세운동은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전개됐다.

#4. 1919년 3월 30일 북면 조치원시장. 세종시에서 최대의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수천 명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 시위에 참가했던 조치원청년단의 맹의섭, 김재형, 이은식, 전병수 등과 김규필, 천종구 등이 중심이 돼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고종 때 시종원주사를 지낸 홍일섭을 거사의 수장으로 추대했다.

거사 일 아침이 되자 이들은 시장 입구에서 장꾼들에게 독립 만세운동을 부탁했고, 오후 2시 홍일섭의 선창으로 시장에 모은 수천 명이 일제히 따라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연기청년회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맹활약했다.

출동한 헌병과 주둔 수비대원들은 총개머리로 마구 사람들을 난타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주모자 중 하나인 김규필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맞아 사람들이 피신시켰고, 젼병수도 심하게 다쳤다. 체포된 자만 수십 명이었다.

그러자 <매일신보> 지국 기자 맹의섭, 이장 변해조, 지방부호 오진표가 헌병분견소장을 만나 고문을 중지하면 다시는 만세를 부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 홍일섭만 제외하고 모두 석방됐다.

홍일섭은 공주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35년 58세로 타계했다.

부강역 앞 광장 만세운동에서는 정인옥 외 여러 명이 일제의 총탄에 순국했다.

#5. 1919년 3월 31일 부강면(옛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역 앞 광장에 수천 명이 밀집했다. 조치원시장 운동에 맞먹는 대규모 만세운동이었다. 헌병이 실탄을 사격해 정인옥 외 여러 명이 순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밤 산에서는 군중이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앞선 30일 밤에 이어 이틀 연속 횃불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31일 밤에는 낭성면에서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도주하기도 했다.

#.6 1919년 4월 1일 충남 공주군 의당면(현 세종시 장군면)에서는 8곳에서 400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튿날에는 10곳 600여 명으로 시위 인원이 늘어났다.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에서도 같은 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오후 2시까지 도계리 주민 약 100명이 동리산 위에 올라 태극기를 달고 횃불을 올렸다. 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연창했는데 공주경찰서 수비대가 달려와 총검으로 해산시키고 7명을 체포했다. 이후 피검자가 30여 명까지 늘었다. 김가동, 김세현, 이선구, 이교찬, 이성실, 박정오 등은 검사국에 송치됐다.
 
이후에도 3.1만세운동은 그칠 줄 몰랐다. 4월 3일 남면 연기시장에서 수백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연기시장 만세운동은 이후 같은 달 20일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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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해 2019-12-10 14:17:32
안녕하세요. 기자님. 여기저기 전화하다가 결국 댓글로 문의 좀 드립니다.
저는 인천에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업체 직원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 기사에 맨 위에 있는 일러스트 이미지를 저희 제품에 부착하고 싶은데 사용이 가능할지 여쭤봅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signplay@naver.com으로 답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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