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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는 관우·장비 단속해 달라는 의미?[이길구의 중국 한시(漢詩)기행] <13>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梁甫吟)’

이번에는 필자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인 제갈량(諸葛亮, 181년 ~234년)의 <양보음(梁甫吟)>을 소개한다.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관심 있는 그림이나 글씨 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었다. 이 가운데 제갈량의 이 작품을 애지중지(愛之重之)하여 지금도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이유는 내용보다 제갈량의 인품과 그의 행적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유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 신(神)에 가깝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제갈량은 도교(道敎)의 신이다. 수많은 도교의 신 가운데 관우(關羽)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 관우가 재물(財物)의 신이라면, 제갈량은 지혜(智慧)의 신이다. 수많은 신중 가장 훌륭한 신은 지혜의 신이 아니겠는가.

제갈량(諸葛亮). 우리에게 제갈공명(孔明)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후한 말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핵심을 담당했다.

제갈량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으로 불린다. 후한 말 군웅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荆州)등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를 도왔고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에 취임했다. 유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의 정치를 담당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를 공략하다가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陣中)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략(智略)과 충의(忠義)의 전략가로 추앙을 받는다. 그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중국 최고의 명문(名文)으로 전해 내려온다.

필자가 소장한 제갈량의 <양보음(梁甫吟)>. 필자는 이 작품을 애지중지하여 집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그가 쓴 <梁甫吟(양보음)>을 살펴보자.

보출제성문(步出齊城門)   제(齊)나라 성문 걸어 나와
요망탕음리(遙望蕩陰里)   멀리 탕음리(蕩陰里) 바라보네.
이중유삼분(里中有三墳)   마을 가운데에 세 무덤 있는데
누루정상사(纍纍正相似)   울룩불룩 서로 똑같구나.

문시수가총(問是誰家塚)   뉘 집 무덤이냐고 물었더니
전강고야씨(田疆古冶氏)   전개강(田開疆)과 고야자(古冶子)라 하네.
역능배남산(力能排南山)   힘은 남산 밀어낼 만하고
문능절지리(文能絕地理)   문장은 땅의 이치 다할 수 있었네.

일조피참언(一朝被讒言)   하루아침 모함하는 말 받아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두 복숭아로 세 장사 죽였다네.
수능위차모(誰能為此謀)   누가 이러한 계책 하였는가
상국제안자(相國齊晏子)   제(齊)나라의 재상(宰相)인 안자(晏子)라오.

양보산(梁甫山)은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태산(泰山) 기슭에 있는 산이다. ‘양보(梁父)’라고도 한다.

이 시는 제갈량(諸葛亮)이 남양융중(南陽隆中)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이다. 양보(梁甫)는 제(齊)지역 태산(泰山) 부근에 있는 험한 산 이름이다. 한(漢)나라 때 장형(張衡; 78~139)이 〈사수시(四愁詩)〉에서 ‘내 그리운 이 태산에 있는데, 그를 따르려 하나 양보산이 험하여라.(我所思兮在泰山, 欲往從之梁甫艱.)’라고 노래하였다.

이후 역대 시인들은 이 산을 인생길의 어려운 장애물로 간주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함을 한탄하거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신하의 슬픔을 〈양보음(梁甫吟)〉에 담아 노래해 왔다. 양보(梁甫)는 ‘양보(梁父)’라고도 한다. 제성문(齊城門)은 제 나라의 서울이었던 ‘산동성 임치(臨淄, 현재의 치박시(淄博市))의 성문’이다. 탕음리(蕩陰里)는 ‘음양리(陰陽里)’라고도 하며, 현재의 임치(臨淄) 성남(城南)지역이다.

누루(纍纍)의 ‘루(纍)’는 ‘루(累)’와 통하는데 ‘봉분의 언덕이 솟았다 낮아졌다 쌓여있는 현상’을 말한다. 문능절지리(文能絶地理)의 ‘절(絶)’은 ‘뛰어나다’는 뜻이다. 전강고야씨(田疆古冶氏)는 전개강(田開疆)·고야자(古冶子)를 말하는데 실제로는 공손첩(公孫接)까지 세 사람이다. 운자(韻字)와 자수(字數)를 맞추기 위해 두 사람만 표기한 것이다.

배남산(力能排南山)은 ‘남산을 밀어냄’으로 남산은 제나라 경내에 있는 ‘우산(牛山)’을 말한다. 문능절지리(文能絕地理)는 앞서 말한 세 용사가 문재(文才)까지 겸비했음을 말한다. 절(絶)은 ‘다 한다’는 뜻의 ‘필(畢)’로 풀이한다. 참언(讒言)은 ‘거짓 꾸며서 남을 참소(讒訴)하는 말’이다.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의 삼사(三士)는 앞서 말한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의 용사(勇士)인 ‘공손첩(公孫接)·전개강(田開疆)·고야자(古冶子)’를 말한다. 이들이 각각 공을 세우고 권력 다툼을 하자, 안영(晏嬰)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복숭아를 두 개만 내리고서 공(功)을 따져 둘만 먹게 하였다. 그러자 세 사람은 복숭아를 다투다가 모두 자살(自殺)하고 말았다. 《안자춘추(晏子春秋) 간하(諫下2)》 ‘복숭아 두 개로 무사 세 명을 죽인다’는 뜻으로, ‘교묘한 책략으로 상대를 자멸하게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국상(國相)은 ‘나라의 정승’, 즉 ‘재상(宰相)’으로 제나라의 재상인 ‘안자(晏子)’를 말한다. 그의 이름은 ‘嬰(영)’, 자는 ‘평중(平仲)’인데 검소하기로 유명하며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제나라(齊)의 경공(景公)이 36세의 공자(孔子)를 존경하여 이계(泥谿) 땅을 주려 했으나 그가 반대했다. 공자는 안자가 30년 동안 옷 한 벌로 산 검소함에 감복(感服)하여 칭찬하는 말을 남겼다. <논어 공야장(論語 公冶長)>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를 풍자한 그림. ‘복숭아 두 개로 무사 세 명을 죽인다’는 뜻으로, ‘교묘한 책략으로 상대를 자멸하게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의 고사(故事)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

때는 춘추(春秋) 시대. 제나라의 경공은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彊), 고야자(古冶子) 등 세 명의 장군이 있었다. 그들의 용맹은 온 제나라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제나라 재상 안영(晏纓)이 길에서 그들 세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오만하여 안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영은 매우 화가 나서, 제나라 경공을 찾아가 말했다.

“왕의 측근에 있는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 세 명의 장군은 자신들의 공(功)만을 믿고 오만방자(傲慢放恣)하게 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에 해(害)를 끼칠 화근(禍根)이오니, 일찍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나라 경공이 물었다.
“그들의 무예가 너무 출중(出衆)하여, 밝혀놓고 잡을 수도 없고, 몰래 죽일 수도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겠소?”

​안영이 말했다.

“그들 세 사람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공로(功勞)의 크기에 따라 복숭아를 먹으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힘만을 믿지, 장유(長幼)의 예의(禮義)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에 경공은 사람을 시켜 그들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보내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복숭아를 먹으라고 했다. 먼저 공손접이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정말 지혜롭군요. 그분께서는 경공으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써 우리들의 공로를 비교해 보시도록 하니 말이오. 나의 힘은 멧돼지도 이길 수 있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으니, 나의 공로로 복숭아를 먹을 수 있소.”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 중국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정치가로 관중(管仲)과 함께 훌륭한 재상(宰相)으로 이름을 떨쳤다. 《안자춘추(晏子春秋)》를 저술했다.

그러자 전개강이 복숭아를 낚아채며 말했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적들을 물리쳤으니, 복숭아를 먹을 자격이 있소."
이러자, 고야자는 이미 두 사람이 복숭아를 차지해버린 것에 몹시 분노하였다.

“나는 일찍이 군주를 수행하여 황하(黃河)를 건넌 적이 있는데, 그때 말이 강 속의 큰 거북에게 물려 들어가 버렸소.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거꾸로 100걸음을 헤엄치고 다시 아홉 리를 내려가 큰 거북을 죽이고 말을 찾아왔소. 당시 사람들은 나를 ‘황하의 신’이라고 불렀소. 공로를 따지자면 복숭아는 마땅히 내가 먹어야 하오.”

이러고는 고야자가 칼을 뽑아 들고 나머지 두 사람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공손접과 전개강은 자신들의 공로로 보아 죽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하며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이러자, 고야자도 자신이 복숭아를 차지하는 것이 의리(義理)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곧 자살하였다.

세월이 흘러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어느 날 제(齊)나라 성(城)을 거닐다가 이들의 세 무덤을 보고 이런 내용이 회상(回想)되어 시(詩)를 지어 한탄한 것이다. 이 시는 《예문류치(藝文類聚)》19권 <음부(吟部)>에 실려 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보인다. 이 고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제갈량의 《양보음(梁甫吟)》의 시 때문이다. 대 시인인 이백(李白) 또한 동명(同名)의 시를 지어 이 고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나라의 재상은 힘이 남산을 갈아엎는 세 명의 장사를 죽이는데, 두 개의 복숭아를 사용하였다(力排南山三壯士 齊相殺之費二桃).’

제갈량은 위 시로 세 용사의 의기(義氣)를 애도하는 한편, 재상 안자의 좁은 도량(度量)을 꾸짖으려는 해석이 있는 반면, 위 세 명의 장수가 경공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기에 안자가 이를 제거하기 위해 취한 불가피한 계책(計策)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갈량이 《양보음》을 부르며 유비(劉備)를 세 번씩이나 초려(草廬)로 오게 한 까닭도 의형제인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단속을 미리 잘해달라는 일종의 메시지 전달 차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안영의 생각은 당시에나 2000년이 지난 지금에나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 집단의 질서를 흩트리는 자, 장차 자신을 방해할 염려가 있는 자 등에게는 인정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것은 ‘춘추전국시대’나 ‘21세기 세계화 시대’나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이길구는 한문학 박사다.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산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계룡산과 실크로드에 대한 많은 저술을 출판한 바 있다. 현재는 한시(漢詩)에 관심을 두고 연구 활동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이길구  gg2009@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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