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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딸, 시대 앞서간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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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딸, 시대 앞서간 신여성
  • 문지은
  • 승인 2018.12.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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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여성·사상가·문인, 그리고 평범한 어머니로서 김제영 선생의 삶
문지은 세종시 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 회장

지난 7일 오전 세종시 은하수공원 달님의 집 봉안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김제영 선생의 영결식. 유족과 세종시 문화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은 이 세상에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선생은 조치원에서 60년 넘게 문학 활동과 음악, 미술 비평을 하셨던 세종시 문화계의 큰 어른이다. 조치원역 인근 여관 골목 2층 자택 지하에서 연극, 미술, 음악 등 예술인들을 모아 지역사회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치원 도시 재생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김제영 문학관’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여성으로서 김제영 선생은 누구보다 당찬 분이었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스무 살 무렵 기자가 되려 했으나 대학 졸업자라는 자격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편집국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해 응시자격을 얻었다. 결국, 100명이 넘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차석으로 당당히 민국일보 문화부에 입사했다.

선생은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기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화를 방해하는 군수산업의 수족은 되지 말자고 경고하신 것만 봐도 이론적 토대가 탄탄한 사상가였음이 분명하다.

조희성 화백이 그린 김제영 소설가의 자택. 조치원 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역전소묘 도시재생 팀은 이 앞을 역전소묘 길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김제영 선생의 삶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독립투사인 아버지였을 것이다.

선친 김관회 선생은 충청도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던 공주 영명학교에서 지리와 일본어를 가르쳤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공주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때 주도자 19명 중 최고형량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아직 독립운동가로 등재되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시 출범 이후 지역 문화 인사를 재조명하는 기회에도 선생은 자신보다 아버님을 재평가해주길 원했다.

김제영 선생의 작품이 고문과 사형폐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마도 3.1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선친의 경험과 한때 비서로 모셨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 간첩으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사건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김제영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간첩 조작사건’에 휘말려 젖먹이를 안고 조치원에서 서울까지 연행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여러 잡지에 조봉암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글을 발표했다. 대법원이 2011년 1월 20일 52년 만에 무죄판결을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선생의 끈질긴 역할이 있었다. 더디고 지난 한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진실은 언제가 밝혀진다는 교훈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다.

김제영 선생은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석려’라는 단편으로 등단한 소설가다. <우문의 설계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소설작품집 <거지발싸개 같은 것>(1981)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1990) 등을 남겼다. 춤, 무용, 음악, 미술 등 예술계 전반에 걸쳐 수많은 평론을 쓰기도 했다. 항상 조치원 역 근처 자택에서 문화예술 인사와 지역 문인들의 등단을 도왔고, 역사와 전통의 동인지 ‘백수문학’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선생이 이념적 갈등이 없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전공한 아버지 슬하에서 이화여고를 다녔던 김제영 선생은 그 시대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늘 배움의 부족함을 한탄했다. 그래서인지 당신은 이면지에 글을 쓰면서도 자식들 교육에는 아낌이 없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그런 선생을 ‘한없이 좋은 어머니’로 기억하고 있다.

피아노에 소질을 보였던 큰딸 차희라 씨는 서울대 기악과를 나와 지금도 미국에서 연주 활동을 한다. 어려운 나라에 보탬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공계 공부도 중시했는데, 둘째 딸인 유라 씨와 아들 지민 씨가 생화학을 전공했다. 유라 씨는 미국에서 전공을 바꿔 회계사로 일하고 있고, 아들 지민 씨는 단국대 자연과학대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민족과 정의 앞에서 올곧은 신념을 지킨 강인한 지식인이면서, 자식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한 어머니, 손주들에겐 다정한 할머니였던 김제영 선생. 조치원 역전 소묘길 자택 앞에 김제영 문학관이 세워져 선생의 겨레 사랑 정신과 문학・예술에 헌신한 선생의 문화적 자산을 후손들이 영원히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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