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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과 이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지[영상으로 다시 보는 윤동주음악회] <7>쉽게 씌여진 시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럽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쉽게 씌여진 시 전문>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잘 알려져 있듯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도쿄 릿쿄(立敎)대학과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수학했는데, 1942년 3월부터 1943년 7월에 해당합니다.

<윤동주 시 깊이 읽기>(소명출판 펴냄, 2009년)의 저자 권오만 전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에 윤동주가 공간 배경을 일본에서 구한 시들은 모두 5편입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간 첫해인 1942년에 쓴 것으로,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여진 시’와 제작 일자가 불분명한 ‘봄’이 그것들이죠.

이 시들은 윤동주가 연전 시절 사귀었던 친구 강처중에게 보냈던 것으로, 강처중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을 작품들입니다.

‘쉽게 씌여진 시’에는 도일 이전의 시들에 나타난, 시대의 아픔과 그 아픔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표현돼 있습니다.

우선 당시로는 입에 올리기에도 거북스러웠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대목이 시를 이끌고 있는데, 자신의 유학 생활을 부드럽고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가 다시 반복되는데, 제8연에서입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곧이어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상상합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아픔과 이를 이겨내겠다는 희망을 노래했던 유학 직전의 시들과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랫동안 윤동주 시를 연구한 일본의 학자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는 ‘쉽게 씌여진 시’에 대해 “서울 시절 볼 수 있었던 심각한 내적 갈등과 고뇌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고 보다 고독하면서 내성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9, 10연이 이 시의 핵심에 해당하는데, 시인은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둠이 절정에 달해 있지만 기필코 이 시점에서 그는 더없이 부끄러운 자기를 벗어나 재생을 바라는 ‘최후의 나’이고자 한다”는 게 우지고 쓰요시 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기나긴 시련과 방황의 과정을 거쳐 최초의 아침을 맞이하는 자기에게 연민을 느끼며 ‘최초의 악수’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시인의 행위는 “이미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자질구레한 번민에 골치를 싸매고 있던 자기를 해방시켜 희망에 찬 새 출발을 가능케 할 지점에 도달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지고 교수가 지적한 대로 ‘쉽게 씌여진 시’는 도일 이전 윤동주의 시들과 비교해서는 한결 밝아지고 자신의 지향에 좀 더 확신에 찬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의 변화는 ‘쉽게 씌여진 시’와 도일 이전 시들의 지향이 그 밑뿌리에서부터 달라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권오만 전 교수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시의 밑뿌리’는 윤동주 시가 말하려는 이념적 지향을 뜻합니다. 그것이 어느 때의 작품이든 윤동주의 일본 관련 시들에는 민족과 국가를 향한 그의 지향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윤동주가 시를 쓰고 있었던 언어 자체가 당시로는 혹독한 탄압 대상이었던 한글이었다는 점이 그의 지향을 웅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풍부한 성량의 바리톤 양진원이 윤동주로 분해 ‘쉽게 씌여진 시’를 부릅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으면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일시 : 2018년 10월 11일 오후 7시
― 장소 : 정부세종청사 대강당
― 주최·주관 : 세종포스트, 창작공동체 ‘이도의 날개’, 행복도시필하모닉오케스트라
― 기획·제작 : 이충건
― 총예술감독 : 유태희
― 지휘 : 백정현
― 출연 : 행복도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바리톤 양진원
― 작곡 : 일지
― 편곡 : 김애라


한지혜 기자  wisdo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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