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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벗어나야 산을 볼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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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벗어나야 산을 볼 수 있지 않겠나
  • 이길구
  • 승인 2018.11.12 09: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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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의 중국 漢詩 기행] <4>소동파(蘇東坡)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여산(廬山)에는 대표적인 3대 사찰이 있는데, 동림사(東林寺), 서림사(西林寺), 대림사(大林寺)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절은 동림사이다.

이 절은 동진(東晋) 시대인 386년 혜원대사(慧遠大師, 335-417)가 창건했다. 그는 도안(道安, 314-385) 스님으로부터 반야경 강의를 듣고 동생 혜지(慧持)와 함께 출가했다고 한다.

도안 스님은 중국불교 교리의 개척자라고 할 만큼 중국불교에서 산파 역할을 했다. 불교 경전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 등 3분법으로 나누어 있는데, 그가 이것을 분리했다고 한다.

동림사(위)와 서림사(아래). 동림사는 혜원대사가 창건한 절로 중국 정토종의 본산이다. 서림사는 동림사보다 9년 먼저 세워졌다.

동림사 바로 옆에는 서림사가 있다. 이 절은 동림사보다 9년 전에 세워진 사찰로 송나라 시대에는 ‘건명사(乾明寺)’라고 했다. 시기적으로 동림사보다 앞서는데 혜원이 바로 옆에 동림사를 건축하고부터는 사양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곳에는 북송 때 대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서림사의 벽에다 쓰다’라는 의미의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가 있어 명맥을 잇고 있다. 서림사보다 소동파의 시를 감상하러 오는 관람객들이 더 많을 정도이다.

필자 역시 양 사찰을 두 번 갔는데 동림사에는 수백 명의 불자가 북새통을 이뤘으나, 서림사에는 인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계룡산으로 말하면 동림사는 동학사요, 서림사는 신원사 같다고 할까. 조용하고 아늑한 서림사의 분위기가 좋아 한참 동안 서성이니 한 비구니가 보인다. 절간이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물으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이곳은 비구니만 있는 절이란다.

앞서 말했듯이 여산은 고대부터 널리 알려진 명산으로 170여 봉우리와 파양호 등 14개의 호수, ‘비류직하 3천척’으로 유명한 삼첩천 폭포 등 20여 개의 폭포가 있어 시인과 예술가, 종교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여산은 2000년 전 사마천이 올라가 《사기》에 기록했고, 도연명(陶淵明), 사영운(謝靈運),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등 1500여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곳을 찾아 4000여 수의 시문과 그림을 남겼다.

또 수많은 문화 유적과 각종 비문 비석이 즐비해 문화 유적의 보고이기도 하다. 과연 서림사 뒤편에 가니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소동파의 시가 확 들어온다.

서림사 뒤편의 소동파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 우리가 알고 있는 ‘진면목(眞面目)’이란 고사가 이 시에서 나왔다.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이네.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
단지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네.

<제서림벽(題西林壁)>의 제(題)는 ‘제명(題名)’이라는 뜻으로 ‘서림사 벽에다 쓰다’라는 것이다. 제사(題辭)와 같은 뜻으로 발문(跋文)과는 대조된다. 글 앞에 쓰는 것을 ‘제’, 뒤에 쓰는 것을 ‘발’이라고 한다.

필자는 계룡산을 연구하면서 선인들이 쓴 기행문인 유기(遺記) 수십 편을 번역한 바 있다. 그런데 글 속에 제명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하여 많은 자료를 찾아보니 제명이라는 것은 당시 사대부가 ‘명승지(名勝地)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임을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사대부들이 사찰이나 중요 명승지에 가면 자신의 이름과 동행인, 그리고 연월일을 적는 것을 관례(慣例)로 여겼다.

당시 사대부들은 제명의식을 당연시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명 사찰을 방문하면 법당(法堂)의 벽상(壁上) 등에 제명했던 일이다. 소동파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시로 적어 법당에 제명한 것이다. 이것을 후세에 소동파가 유명인사가 되자, 밖에다가 시비를 만든 것이다.

시를 감상하여 보자. 전체적으로 보면 시에 사용한 언어가 매우 쉽고 평범하다. 그냥 여산을 보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적지 않았을까 한다. 여산은 웅장(雄壯)하고 기묘(奇妙)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다. 가로로 보면 산봉우리가 이어진 하나의 연산(連山)이고, 세로로 보면 홀로 우뚝 선 산봉우리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아도 다르고, 높고 낮아서 같은 것이 없다. 시인이 가변적인 상황에서 기기묘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작자는 처음에는 함련(頷聯)을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산을 보니 각기 다르다(遠近看山各不同)”라고 한 것을, “멀고 가깝고 높고 낮아서 같은 것이 하나 없네(遠近高低無一同)”라고 다시 고쳤다고 한다. 시안에는 거시(巨視)와 미시(微視)적 시각, 근시(近視)와 원시(遠視)적 시각이 있다. 숲만 보면 나무를 볼 수가 없고, 나무만 보면 숲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 시의 핵심은 경련(頸聯)와 미련(尾聯)이다. “여산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은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네.” 이것이 소동파가 시에서 하고 싶은 핵심 내용이다.

‘여산의 진면목(眞面目)’은 ‘세상을 바라보는 참된 안목’을 상징한 말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과 같은 뜻으로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모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불(本來佛)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진면목’이다. ‘진면목을 보여 준다’라고 할 때의 진면목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물의 참모습을 보려면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 겉에 드러나지 않은 이면(裏面)을 잘 알아야 한다. 유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론이요, 불교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한다. 나 자신의 참모습을 보는 것도 똑같다. 산속에 갇히어 있으면 산 전체의 모습을 결코 볼 수 없다. 산을 벗어나야 산을 볼 수 있고, 숲을 벗어나야 숲을 볼 수 있다. 인생의 깊이가 담긴 명귀(名句) 중의 명귀이다.

호계교 표지석과 삼소도찬(三笑圖讚). 호계교는 중국 고전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발상지이다.

여산과 동림사와 서림사, 그리고 혜원 스님을 말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전설이다. 사찰 앞에는 호계라는 냇가가 있는데 이곳이 중국 고전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호계삼소’의 발상지이다. 호계삼소는 혜원 스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님은 이 절에 들어온 후 절대 호계를 넘지 않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간혹 손님을 배웅할 때에는 항상 절 앞의 개울인 호계를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이 다리 옆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는데 혜원이 무심코 다리를 건너려고 하면, 이것을 알고 포효(咆哮)하여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교 학자인 도연명(陶淵明)과 도가의 대가(大家)인 육수정(陸修靜)이 동림사에 왔다가 돌아가고자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서로 이야기하다가 혜원도 그만 이 다리를 넘자, 호계교를 지켜보고 있던 호랑이가 포효했다. 혜원은 깜짝 놀라 다리를 건너지 않았고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고 해 ‘호계삼소’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송(宋)나라 진성유(陳聖兪)의 《여산기(廬山記)》에 나오는데, ‘호계에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내용으로 ‘어떤 일에 열중하여 평소의 습관이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교제 이야기는 후인들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혜원은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3년(417)에 약 83세의 나이로 입적했고, 도연명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송나라 원가(元嘉) 4년(427)에 사망했다.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가 30년 정도이지만, 도연명은 여산에서 멀지 않은 심양(潯陽) 사람으로 두 사람이 교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육수정은 남조 송나라 원위(元徽) 5년(477)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따라서 70년 정도의 나이 차이로 볼 때 이들이 교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혜원의 생몰 연대는 334∼416(혹은 417)년, 도연명은 365∼427년, 그리고 육수정은 406∼477년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배경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유불선(儒彿仙)의 갈등을 보면서, 이곳을 연고로 한 불교·유교·도교의 대가들이 만나 교류했음을 주지시키며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에 호계삼소는 유명한 고사가 되었고 이에 관한 시나 그림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졌다.

근래에 불교의 비구니 스님과 가톨릭 수녀, 그리고 원불교 여교무들이 삼소회(三笑會)를 조직해 종교 간 이해를 도모하고 있는데 이 역시 호계삼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삼소회’라는 모임 단체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전설이 지금도 좋은 뜻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호계교 표지석 앞에서 필자와 중국인 역술가. 필자는 호계교 앞에서 중국인 역술가를 만나 호계삼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동파가 여산에 와서 명시를 남긴 것과는 달리 그의 동생 소철(蘇轍(1039-1112)은 호계삼소라는 말이 유행하자, 직접 이곳 호계에 와서 이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견해를 시로 남겼다. 그가 남긴 시는 <부도동서이림(不到東西二林)>이라는 시로 ‘동서림사에 오지 않았다’라는 글이다.

산북동서사 고인원영사(山北東西寺 高人遠永師)
내유역전정 회수독이시(來遊亦前程 回首獨移時)
사산백련진 산공현학비(社散白蓮盡 山空玄鶴悲)
하년도정절 계상송행지(何年陶靖節 溪上送行遲)

여산 북쪽 동림사와 서림사에 고승인 혜원과 혜영이 있었네
와서 구경하다가 갈 길이 멀어, 고개를 돌려 홀로 발걸음을 옮길 적에
결사는 흩어지고 흰 연꽃은 모두 졌는데, 텅 빈 산에는 검은 학이 슬피 우네
도연명이 살던 것이 어느 때였나, 호계에서 발걸음이 더뎌지누나.

고려 후기 유학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도 ‘여산삼소(廬山三笑)’라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석도어유이본제(釋道於儒理本齊)
강장분별자상미(强將分別自相迷)
삼현용의무인식(三賢用意無人識)
일소비관과호계(一笑非關過虎溪)

불교와 도교는 유교와 이치가 본래 같은데
억지로 분별하여 스스로 미혹하네
세 사람의 어진 뜻을 사람들은 모르니
한바탕 웃음이 호계를 지나치는 것과는 상관없다네.

필자 이길구는 한문학 박사다.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산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계룡산과 실크로드에 대한 많은 저술을 출판한 바 있다. 현재는 한시(漢詩)에 관심을 두고 연구 활동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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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須臾離 2018-11-30 13:44:17
가로지른 산자락 아련한 산봉우리
보는 이 따라 천차만별
여산 참모습 내 마음 파지 못함은
단지 이몸 산속에서 헤매임이라
..
* 오호 통재라.. 언제나 나를 찾을꼬?
글 잘읽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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