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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을 노래하다[이규식이 만난 사람] <6> 추사의 삶과 예술, 학문을 시집으로 펴낸 신익선 시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예술, 정신과 학문을 노래한 전 3권짜리 시집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예산문화원 발행)를 출간한 신익선 시인.

우리가 잘 아는 듯하지만, 실은 잘 모르고 있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1786-1856). 폭넓은 지명도에 비하여 일반에게 알려진 내역은 늘 교과서에 수록된 몇 줄 설명 차원을 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삶과 예술, 정신과 학문을 노래한 전 3권짜리 시집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예산문화원 발행)를 펴낸 신익선 시인을 만났다. 이 시집은 추사 선생의 진면목과 미덕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현대성 등을 유장한 시 가락으로 형상화하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역동적이고 왕성한 작품 활동과 학문연구에 정진하는 신익선 시인이 추사 김정희 선생께 보내는 흠모와 경도의 노래는 점차 호흡이 짧아지고 개인적이거나 일상 언저리 미시적인 시적 제재에 관심을 두는 이즈음 우리 시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추사 김정희 초상. 대한민국 보물 제547-5호.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업적은 모두들 알고 있는 듯하지만, 막상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단편적 지식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신 시인께서 추사선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또 추사 선생의 삶과 업적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추사 선생과 나는 충남 예산 동향이다. 동향이라는 말 속에는 한 통속이라는 의미 군이 자리한다. 동질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자고새면 듣고 보는 일이 추사 선생과 연관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동향이라는 말은 예사롭게 지나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전남 장흥의 토굴에 거주하는 한승원 소설가를 찾아 간 적이 있다. 때는 가을이었다. 이 분이 소설집으로 추사 1, 2권을 집필하였다는 전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곡이 무르익어갈 가을에 뭔가 허전한 마음보따리를 지고 예산 집에 귀가했다. 그동안 늘 듣고 보던 추사 이야기들을 경홀히 지나쳤음을 새삼 깨달았다. 더구나 한승원 소설 첫 문장은 ‘초생아, 나 따라가자’였다. 월성위궁 궁주였던 젊은이 추사가 기생과 함께 말 한 필을 타고 달리는 광경묘사였다.

정말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추사는 그런 호방한 성격의 사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추사 소설은 1, 2권으로 똬리를 틀었다. 물론 소설이 허구의 가상세계에서 펼쳐지는 문학 장르라는 점에서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에 이를 책잡을 마음은 없다. 그 외에도 무려 10권으로 된 소설을 비롯하여 추사 관련 서적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동향의 예산 사람이 쓴 창작집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좀 웃기는 일이 아닌가. 내 아버지 일대기를 아버지의 자식인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동향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육친의 혈육 못지않은 어떤 피의 끌어당김, 이것이 내가 추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추사 삶의 변별성은 한마디로 학예일치의 삶이다. 추사업적의 요약은 학문과 예술의 최고, 최대 경지를 개척한 일대의 통유란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예술사에서 아직 이론이 없다.”

― 김정희 선생은 서예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아울러 학자, 특히 실학의 대가 그리고 금석학 등 여러 선구적인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당시 시대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그분이 벌인 학문 활동이나 예술분야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추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상 작용은 추사체다. 추사학문의 얼개는 선고장 되시는 김노경의 훈육 영향이 컸다. 이외에도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부마였고 조부가 영의정을 지낸 가문의 후광 역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추사의 학문 활동이나 예술분야의 업적을 평가하려면 추사의 미의식에 대한 고찰이 우선돼야 한다. 유년시절부터 사서삼경을 독파하며 시작된 추사 학문의 기반은 중국의 진나라에서부터 북학의 원류인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과 제 예술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학자이면서 대예술가였던 추사가 이룩한 경학, 금석학, 서예, 회화, 시, 문장, 감상 등은 오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는 모두가 독특하고 고유한 추사만의 도그마가 만들어낸 열매들로써 너무나 경이롭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신익선 시인이 출간한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예산문화원 발행).

― 추사 선생의 삶과 예술, 학문을 방대한 세권짜리 시집으로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집필과정에서 어려움이 컸을 것 같다.

“추사를 집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거공간이었다. 추사고택 옆에 누옥을 장만했다. 이곳이 주거처지가 되었다. 유택에 계신 추사 선생을 만나 뵙기 위해 나는 묘소에 이르러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재배를 올리곤 했다. 이 일은 내게 있어 일종의 제례였다.

이 책은 애당초 3권짜리 분량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다. 한 권으로 마치려는 것이 애당초 계획이었다. 그런 의도를 무산시킨 계기는 꼼꼼히 추사 일대기를 살피다가 추사가 쓴 해인사 중건상량문을 읽었을 때였다.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며 놀랐다. 그 놀람의 강도가 너무 강렬했다. 어찌 단순한 문장이라 할 수 있으랴. 경전이었다. 예사 글이 아닌 일종의 경(經)과 같은 삼라만상에 내포된 심오한 사상과 현상들이 총망라되어 도도한 물결로 흘러가는 대하와도 같았다.

그날 이후 1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예술계를 풍미했던 한 천재를 새롭게 각인하게 됐다. 그 천재를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갈망에의 현시가 나를 늘 괴롭게 만들었다. 추사 고택 옆에 우거를 마련하고 마치 전쟁하듯이 집필에 몰두한다고 하였으나 현란한 조망이 아닌 미숙한 필체로 대천재를 그려내는 고뇌를 누가 알겠는가. 집필의 보람을 논하기 전에 그 점이 3년여에 걸쳐 집필하는 내내 심적으로 괴로웠고 어려웠다.”

― 이번에 펴낸 세권짜리 시집은 매우 방대한 서사시인 동시에 시로 쓴 평전, 한 위대한 선각자에 대한 시적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작품 가운데 필자 본인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목을 골라 인용하고 간략한 코멘트를 곁들여 주기 바란다.

서까래에 내린 초승달빛 품고 사는 예산 향저鄕邸 시렁,
예산 구렁목 금강송 붉은 가지로 만든 도끼자루를 가진 손도끼 있다
붓을 물고 있는 얄팍한 대나무가 벼린 붓끝
옹골찬 도끼자루 결 따라 만나는 뭉툭한 도끼의 날처럼
저 바싹 날선 붓이 사정없이 정수리 내리치는 일순간의 그 찰나다 .

여섯 살 먹은 손으로 월성위 궁 대문에 쓴 입춘첩이
형조참판, 지금의 법무부차관을 포박, 주리 틀어
무려 엿새 동안 모진 고문을 하고 서른여섯 대의 태장을 안기다 못해
무려 만 구년 사 개월, 쉰다섯 살에서 예순 여섯 해 동안
인두불로 지진 상처에 검붉은 피멍울 터트려 핀 새빨간 동백꽃잎 무색해라
황량한 제주와 북청 들판 울리는 대장간 쇠망치로
바로 눈앞에서 빤히 쳐다보며 번번이 칠흑의 죽음을 두드렸다

돌과 바람, 절망과 체념, 그리고 몽당붓들의 눈알인 추사체,
그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폐허의 골짜기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우주의 한 존재, 내자를 만나
오직 결기로 뭉쳐진 웅혼한 폐부에 소용돌이친 그를 보다

뼈아팠던 일생이었으나 도도한 자존, 시대를 초월한 해학으로
마침내 자화煮火하는 일흔 한 살의 추사몸짓에 섞여
승천, 동지 지나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포르릉 날렵하게 산새도 날아
반도의 중심 예산에서 온 겨레에게 추사라는 삶과 붓도끼 날다

졸고는 추사를 집필한 3권의 책 중에서 상권 책 첫머리에 나오는 <서시> 전문이다. 추사 일대기의 간략한 줄거리다. 형조참판의 벼슬을 지낸 추사가 서른여섯 대의 태장을 맞고 제주도로 위리안치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함경북도 북청 유배와 해배의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자신을 지키면서 학문과 예술이라는 신경지를 개척하며 피나는 여정을 걸어오셨는지를 운문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이 <서시>는 그러므로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 상, 중, 하권을 여는 핵심 열쇠다.”

신익선 시인은 추사고택 옆에 누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 전3권을 집필했다.

― 추사 선생의 실학자로서의 사상과 업적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면모였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학계에서 추사는 실학의 유파 중에서도 이익(李瀷) 등의 경세치용학파, 혹은 홍대용 등의 이용후생학파와 더불어 실사구시를 연 학자로 분류하거나 추사가 박제가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아예 북학파 속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는 시대별로 나누어 유형원, 이익 등의 전기실학과 홍대용, 정약용 등의 중기실학을 이은 사람으로 최한기와 더불어 후기 실학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어느 쪽에서든 추사를 실학자로 보는 관점은 같다.

실학은 기존의 성리학이 허례허식에 치우쳐 이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유학의 한 분파이며 추사는 이를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추사가 주창한 학예일치 논거에 사실과 실제가 부합했다는 생각이다. 추사의 실학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야할 분야이긴 해도 실학자로서 추사의 관점은 시의적절한 면모였다 생각한다.”

― 추사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그 분의 생애 중 가장 인상적인 시기의 한 대목이나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추사가 금군에 나포되어 예산 향저에서 포박당하고 압송된 후에 태장을 맞은 것은 55세 때였다. 선친인 김노경을 따라 24살의 추사가 북경을 다녀온 이래, 선친이 갔던 그 길을 따라 청나라로 가는 동지겸 사은사 부사로 임명받은 1840년 여름의 일들이었다.

삼사에서 사형을 주청하는 상소가 빗발치는 와중에 죽마고우였던 우의정,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조인영의 감사 주청으로 겨우 구명하여 그해 9월 2일 유배 길을 떠나면서 두륜산 대둔사에 들러 절친인 초의선사를 만났을 때였다.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인 《대웅보전》을 떼어내도록 한 뒤 추사가 쓴 《무량수각》으로 대체하게 했다. 그때는 몸에 태장을 맞아 걷기도 힘들 터였다. 게다가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져오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었다. 그 와중에 어떻게 먹을 갈아 글을 쓰며 유유히 유배 길을 떠난단 말인가.

이 대목은 추사의 자고함이 어떠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 기막힌 것은 해배되어 오는 길에 다시 초의를 만나서 추사가 직접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도로 제 자리에 부착했다는 점이다. 이는 즉 추사 인격의 원숙함을 드러내는 증좌이다. 이 밖에도 무려 500개가 넘는 호를 지어 사용한 것도 스스로의 과시욕과 스스로에 대한 위로가 묻어 있는 자신과의 대화록이었다는 점에서 각 아호마다 무수한 에피소드가 내재한다.”

추사고택(예산군청)

― 추사 선생은 신 시인의 고향 예산이 낳은 걸출한 위인이신데 이번 기회에 충남 예산에 대해 자랑을 해달라. 특히 문화예술 분야를 중심으로 얘기하면 좋겠다.

“충남 예산을 일러 흔히들 예향이라 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추사가 있다. 추사는 예산 인물이 아니라 세계사적 위인이다. 조선이 역사이래로 중국을 제압한 경우는 없었다. 오직 유일하게 한 사람, 추사만이 청나라를 압도하였다.

청나라 문인 화가 서예가들은 앞 다투어 추사 글을 받고 대면을 요청하는 바람에 추사의 명성은 청나라 전역을 광풍처럼 휩쓸었다. ‘요로원야화기’를 쓴 박두세를 비롯해 근대문학의 효시를 연 방인근, ‘분례기’의 방영웅, ‘장마’를 쓴 윤흥길, 한국시단의 큰 별이었던 성찬경 시인, 이응로 화백, 이용상 화백. 최완수 간송미술관장 등의 예술인들이 자리하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수덕사와 추사고택, 덕산온천 등의 관광지와 더불어 내포의 중심고을, 문화예술로 빛나는 고장이다.”

― 서예가로서 추사선생의 수월성과 업적을 사실 구체적으로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이번 기회에 추사체로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술세계를 포함해 그 분의 재능과 수련과정 그리고 중국서예와의 영향 관계 등을 소개해 달라.

“매혹적인 질문이다. 수십 페이지로 연결되는 분량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렇게 길게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추사의 예술세계를 축약해 표현한다면 ‘법고창신(法古昌新)’이다. 추사가 평소에 쓰던 말이다. 수련과정이 추사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멀리는 중국의 진나라에서부터 시작해 남북조시대 및 명,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한송절충론, 철학과 비학의 절충, 명·청대 남종문인화가론과 양주팔괴, 성령론과 신운설 등등의 논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중압감이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추사를 소동파에 비유했으며, 중국서예 역시 추사가 밝힌 대로 완원의 서예론을 수용하면서도 왕희지체를 여전히 학습 대상으로 높이 평가해 중국서예가들과 예술적 천착을 기했다. 다시 말하면 추사의 서예론은 추사 예술론 및 중국서예론과 일맥상통하는 주요 고리인 것이다.”

― 이번에 출판한 세 권의 시집은 영어 번역을 곁들였다.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출판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이 시집의 활용방안 그리고 김정희 선생을 현양하는 신 시인의 개인적인 계획은 무엇인가.

“향후 이 시집의 정수만 추출해 한권으로 요약해볼 심산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추사의 시편들을 일괄 정리한 추사시학 연구서도 펴낼 작정이다. 추사는 서예뿐만이 아니라 시론에 있어서도 그 깊이가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이를 형상화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낀다.”
 
―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해 대중께 알리고 싶은 말씀이나 당부가 있다면.

“암울한 유배시절에 추사는 매일 반일정좌(半日正坐)를 했다. 하루에 반나절은 가부좌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셨다. 끓어오르는 번뇌를 명상으로 다스리면서 학문과 예술의 성취를 이룩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인격을 고양시켜 갔다. 그리하여 추사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리면서 추사의 절친 권돈인은 ‘옥과 같은 인품’이라는 제문을 썼다.

위대한 예술인이자 위대한 인격자였다는 증거는 이외에도 많다. 모쪼록 추사의 인품과 예술의 업적이 널리 알려져 예산의 추사고택이 전국에서 몰려오는 인파로 몸살 앓을 미래를 연상해 본다.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추사를 대강 아는 인사들이 추사서예와 그림을 들어가며 작품이 진품이네 위작이네 망언하는 걸 예사로 여긴다는 점이다. 일일이 거명하여 논쟁하기는 무의미하다. 추사를 거명하며 다양하게 주장하는 오류의 남발에 실소를 금치 못할 뿐이다.”

'이규식이 만난 사람'의 진행자 이규식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며, 저서와 역서로 ‘문화카페에서 꿈꾸다’ 등 35권이 있다.

이규식  victorhug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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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오영미 2018-09-19 10:06:04

    주옥같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신익선 시인의 걸작이며, 예산의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믿습니다.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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