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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시인의 희망 메시지 “실존철학의 여유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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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시인의 희망 메시지 “실존철학의 여유 가져야”
  • 유태희
  • 승인 2018.09.05 09: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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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문화 인물] 시인 김백겸

늦여름 녹음이 위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저녁입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들이 늑대처럼 울부짖기 시작하는 저녁입니다
벌판 소나무 숲이 바늘 같은 침묵의 푸른빛을 허공에 내뿜는 저녁입니다
소나무 뿌리가 뱀 무리처럼 드러난 공터에서 청설모들이 나뭇가지를 뛰어
넘는 저녁입니다
까마귀 검은 날개와 황혼이 칵테일처럼 섞인 저녁입니다
당신께서는
쐐기풀에 날개를 접은 산제비나비와 저녁 하늘에 뜬 얼음 같은 흰 달을 불
러주세요
밤하늘 정원에서, 탄생과 죽음의 이상한 수수께끼 속에서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존재의 신비, 그 부적(符籍) 신호를 - 개망초 흰 꽃처
럼 보게 해주세요
<개망초 전문>

김백겸 시인은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충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문학마당> 편집위원, 계간 <시와 표현> 주간, 웹진 <시인광장> 주간 등을 역임했다. 시집 <향수는 자전거를 타고 와서> <가슴에 앉힌 산하나>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거울아, 거울아> 등의 시집이 있으며, 평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 <유쾌한 시학 강의>(공저) 등을 출간했다.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지회장, 한국민예총 대전충남지회장 등을 지냈다.

― 세종시민이 되신지 얼마나 됐나. 전에는 대전에서 사신 것으로 알고 있다.

“대전에서 60년을 보내고 한솔동 첫마을에 입주하면서 세종시로 이사했다. 세종시가 상전벽해로 바뀌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우리 세대는 농경시대의 풍경부터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로 사회가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진입에 서 있다.

변화를 압축시켜 경험하는 삶이란 얼마나 흥미로운가. 세종시는 그런 다이내믹한 한국 현실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에서의 노후 생이 기대된다. 삶을 열심히 즐기는 젊은 사람들과 있으면 아무래도 덜 외롭울 것 같다.”

―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등단은 어떻게 했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운동과 사교적인 놀이 보다는 혼자 책을 보고 상상을 하고 노는 그런 삶을 살았다.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교우도 지극히 한정된 범위였다. 충남대학교에 진학해 학보사 생활을 한 것이 현실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런데 전공인 경영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경영학은 인간과 물자를 대상으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법에 관한 학문이다. 자본이 투자한 기업을 관리하는 대리 집사 양성소임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40년 동안 회계와 감사 업무로 생계를 해결했지만, 인생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문학책들을 봤기에 취직 후 본격적으로 문학과 철학, 미학과 역사책들을 보면서 혼자 공부했다. 시도 이때 집중적으로 습작을 했다. 당시에는 다소 늦은 30세에 1983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됐다.”

― 시인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소개해 달라.

“나는 모더니즘 기법의 시를 썼는데 당시는 80년대 민중문학이 대세여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시로는 입신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40대 10년간 시를 포기하고 아내의 전공을 살려 대전에서 두 번째로 큰 컴퓨터 학원을 차렸다가 IMF로 모두 휴지가 됐다. 인생 계획이 모두 어긋나서 인생을 체념한 채 와신상담으로 50대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단 환경이 바뀌어 있었다. 잡지편집자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1년에 20~30편씩 맹렬히 잡지에 발표했다. 50대 이후 시집 4권, 시론서 3권을 냈다. 잡지 편집에도 관여해 계간 <시와 표현> 주간 4년, 웹진 <시인광장> 주간 10년을 하면서 시단의 현장에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체 권력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많은 시인의 시 세계와 삶을 들여다보는 공부의 현장이었다.”

― 짐을 내려놓고 은퇴 후의 삶은 어떤가.

“작년에 직장과 잡지의 현실책무로부터 모두 벗어나 은퇴 백수의 자유로운 삶을 시작했다. 오로지 시만을 들여다보고 쓰는 삶은 20대부터의 로망이었으나, 운명이 65세에 이르러 겨우 이런 삶을 허용했다. 재관(財官)의 오행이 무거운 내 사주팔자 소관이 아닌가 싶다.

― 시인의 시대적 사명이랄까, 이 시대에 시인의 소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시가 문학의 제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제정일치 시대 하늘의 정보 혹은 인간의 미래가 신탁의 형태로 샤먼과 무녀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시절이다. 역사와 스토리가 구전에 의한 암송의 형태로 전달되던 시절까지도 시는 장르 우위에 있었다. 근대 동양 농경시대의 유교와 서양 봉건 귀족의 궁정에서도 시는 상류층의 주요 교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문화가 하향평준으로 대중이 옛날의 모든 귀족 문화를 향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과 감정의 정보도 영상데이터로 차고 넘친다. 시는 이제 대중에게 직접 다가서는 전달 지위를 포기했다. 대중은 시를 읽지 않는다. 시는 전문가끼리 돌려보는 학회 논문 같은 성격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원초적인 형식인 시는 다른 예술장르에 영감을 주는 메타(meta) 예술의 지위는 유지하는 것 같다. 어떤 예술가든 내면의 포에지(poésie) 없이 예술 창작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는 응용산업과학시대의 기초 과학 같은 지위를 유지한다. 기초 과학은 돈이 안 되니까 정부가 출연연구소들을 세워 학문과 과학자들을 양성하지 않는가. 시도 문화예술진흥기금이 없으면 시집을 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도 현재 우리나라 시인이 3만 명이라는 집계가 있더라. 내가 등단할 때는 약 3000명 정도였으니 10배가 늘어났다. 대중은 시를 읽지 않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시를 발견하고자 하는 전문 인력은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상처와 콤플렉스에 노출된 삶을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는 정화(katharsis) 욕망이 있다. 독자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시가 사회적 상처를 치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이 시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시가 시인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확실하다.”

― 시는 사명이라는 말이 있다. 시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시가 사명이라는 말은 너무 고전주의적인 엄숙함이 있는 용어가 아닌가 싶다. 젊었을 적에는 이런 단어의 무게를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 휴지기를 포함한 제 시력 35년의 경험으로 본다면 시는 즐겨야 한다. 라깡(J. Lacan)의 용어로는 시의 주이쌍스(Jouissance)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시작(詩作)은 그 출발점이 훌륭한 시인들의 작품을 제대로 읽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많은 시 지망생들 혹은 등단 시인들도 훌륭한 시들을 제대로 안 읽고 시를 쓰는 경향이 있다. 자신만의 감성에 의존해서는 삼류 시를 쓸지 몰라도 일류 시를 쓰기는 어렵다. 피아노를 예를 들면 루빈스타인이나 리히터의 연주를 들어보지 않고 피아노 연습생이 혼자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연습생이 대가들의 주법을 공부해서 자신만의 표현으로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일류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인 지망생이 대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읽는다면, 다시 말해 소화해서 자신만의 표현으로 승화할 수 있다면 헤밍웨이의 표현에 따르면, 나머지는 시인 지망생 자신의 4계절과 굴곡 인생이 스스로 해결해 줄 것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데 대해 김백겸 시인은 "지금이 겨울이라면 기다려야 한다. 실존철학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요즘 경제가 어렵다. 젊은이들은 취직이 어렵고 소상공인들은 최저임금정책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희망과 비전을 주는 한 말씀 부탁한다.

“내 20대는 대한민국의 운세가 한여름이던 시절이다. 기업은 한 잎의 이문을 위해 뛰는 개성상인처럼 이익을 위해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뛰었다. 많은 기업에 일자리가 있었고 대학을 안 나온 친구들도 공장과 상점에 가면 블루칼라의 일자리가 있었다. 당연히 험한 일을 해서라도 자신과 가계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시대였다. 단칸방 월세를 살아도 제 짝의 짚신을 찾아서 결혼하고 독립하는 문화였다.

우리가 88년경에 소득 1만 불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다들 인생에 의욕이 있는 시절 아니었나. 지금은 소득 3만 불 시대지만 젊은이들이 블루칼라의 일자리라도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욕이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이 성장과 추수의 시기를 지나 겨울에 진입했다는 경기순환론자의 시각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부모세대가 축적한 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부가 소모되는데 한 세대는 아니고 앞으로 한 20년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경기주기와 젊은 사람들의 달라진 현실 처지가 새로운 경기 상승 국면을 만들어 낼 것으로 본다. 일본이 20년 겨울을 보낸 뒤 지금 새로운 경제의 봄을 시작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국운의 4계절에 따라 태어나는 운명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지만, 살아보니 인생은 봄과 여름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을과 겨울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기다려야 한다. 돌이켜 보니 인생은 인내다. 견딘 사람만이 현명하게 살아남는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80을 넘으니까 누구든 60년 주기 내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경험한다. 일생에서 어떤 사람은 여름을 두 번, 어떤 사람은 겨울을 두 번 경험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지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서라는 실존철학적 여유도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 어릴 때처럼 거지와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지금 젊은이들은 5000년 대한민국 역사 최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의 시간과 공간의 처지를 정확히 아는 것, 여기에 미래의 답이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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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 2018-09-26 11:19:26
살아가는 데 있어 문학의 의미가 뭘까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기사였습니다 . 시인이 3만명이라니 우리나라에서 예술가 수가 제일 많은 인기 장르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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