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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를 찾은 두 번째 추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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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를 찾은 두 번째 추모 여행
  • 김영훈
  • 승인 2018.08.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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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잊을 수 없는 후쿠오카 추모 행사

 

김영훈 소설가 | 대전문인총연합회장

내가 운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여행을 떠난 것은 벌써 여러 해 전이었다. 그러니까 2015년 2월 8일 아침 오전 여덟 시 정각이었다. 나는 <창작산맥> 발행인 김우종 교수를 주축으로 한 일행과 어울려 윤동주 시인의 순국 70주년 추모 행사를 하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로 가는 비행기 트랩에 오르고 있었다.

그날 나의 마음은 아주 숙연했다. 윤동주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분이지만 내 가슴속에도 각인된 시인이었다. 그날, 나는 대한항공 후쿠오카행 이코노미 34F번 자리에 앉은 후에도 그의 애국과 저항과 순수한 시 정신에 몰입된 상태로, 조용히 언제였던가 먼 그날처럼 윤동주의 '서시'를 읊조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序詩 전문>

2015년 2월 8일 후쿠오카 옛 감옥터에서 윤동주시인 7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우종 추모단 대표(창작산맥 발행인)를 비롯한 문인 20명이 참석했다.

나는 그날도 윤동주의 서시를 읊으며 용정을 찾았었다. 2006년 여름이었다. 일행은 백두산 등정에 마음들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 윤동주 시인을 찾는다는 기대감에 마음을 더 설레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푸르디푸른 나이에 일제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저항시인 윤동주를 만난다는 것은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작은 소망이요, 큰 행복감이었다.

그날 용정중학교 교정에 들어서면서 내 마음은 정말 더욱 숙연해졌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순국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윤동주 시인은 용정중학교에서 영원을 살고 있었다. 아니, 우리 가슴에 별로 남은 윤동주 시인은, 용정이 아닌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고 있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일행과 함께 섞여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는 자취를 따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시비 앞에서는 몇 사람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면서 깊은 명상에 젖었다.

사람은 유한한 목숨을 살다 이승에서 사라지지만 비록 몸은 흙 속에 파묻힌다 해도 그 사람이 남긴 업적과 정신이 후세에게 푯대가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마다에 살아 있다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 날, 저항시인 윤동주를 가슴에 담았었다.
 

한국문인, 교포, 일본인 윤동주시낭송회 회원 등 150여명이 윤동주 시인에게 헌화했다.
윤동주 시인의 친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추모행사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나 역시 일본에 대한 저항감으로 유년을 자의식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나라가 독립한 지 두 해가 지난해인 1947년에 태어난지라 유년의 삶 속에서 일제의 잔재를 느끼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었다. 어릴 때는 무서운 일본 순사 이야기랑 게다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만 그랬는지 몰라도 그냥 걸러지지 않고 쓰였던 일본말의 홍수 속에서 ‘벤또(도시락)’, ‘사리마다(팬티)’. ‘오니(술래)’라는 말들을 상용화하면서 살던 유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를 가르쳐 주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왜놈들이 우리 땅을 탐하고 틈이 있을 때마다 노략질해갔다는 사실을, 교단에서 거의 날마다 강조했었던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역사 시간은 반일 감정으로 충일되어 그들을 질타하는 토론으로 일관했었다.

더구나 내게 유년 시절 내내 반일 감정에 기름을 부어 준 두 분이 더 있었다. 지진이니 태풍이니 하는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그것도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에서 대륙을 향한 꿈을 꾸어온 백성들이었기에 우리 삼천리강산을 탐한 고약한 자들이라고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우리 집 옆에 있던 서당 훈장님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일제의 만행을 들으며 성장했다. 또 한 분이 있었다. 백제를 향한 환고향하고 싶은 뿌리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오히려 침략이라는 양상으로 왜곡된 채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는 작자들이 바로 '일본인'이라는 말도 귀에 익어있었다. 신식 교육을 받은 인테리 여성인 백모에게 들은 얘기였다.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2015년 2월 8일 규슈대학 강당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아우인 고 윤일주 선생의 아들이다.

나의 백모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김사국과 박원희의 외동 따님이었다. 그분은 김좌진 장군 등의 청산리 싸움 등 독립운동사를 나에게 이야기꾼의 기질을 살리면서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러기에 내 유년 시절의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은 확고했고, 점점 공고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에 진학하며 생각의 힘이 자라고, 또 역사를 바라보는 의식이 생기면서 일본을 보는 눈이 더욱 강화된지라, 나는 오래도록 일본을 미워하면서 살았다. 더구나 문학을 지망하며 자아의식이 생기고부터 일제 저항기의 문학에 대해 학습하면서는 더욱 그랬다. 그때 백모를 통해 알게 된 시인이 윤동주였다. 나는 운문 쪽이 아니고 산문 장르인 소설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한용운, 이육사와 더불어 윤동주는 내 가슴에 청소년 시절 이후 아주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었다.

윤동주, 그의 생애는 비록 짧기만 했지만, 우리 가슴에 영원한 분이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에서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한다.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결국은 1945년 2월 16일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일제는, 사상에 대한 실질적 검증도 없이 윤동주를 서둘러 죽였다. 그것도 생체실험의 희생자라는 걸 회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요즈음 군 위안부에 관한 사안이 최대의 이슈이지만 이에 못지않은 것이 윤동주 시인과 같은 생체실험 희생자에 대한 문제이다. 이런 일본의 만행은 언제인가 낱낱이 파헤쳐져야 한다.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 김용재 시인, 니시오카 켄지 후쿠오카대 명예교수.

자료를 통해 보면 시인 윤동주의 시적 자질은 일찍이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이미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 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아마도 그의 시 세계가 저항적이면서도 순수한 이유가 동시를 습작하면서부터 문학을 시작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맞다. 바로 원초적인 인간의 마음인 동심에서 우러나오는 문학적인 습작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 후,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을 발간하려고 할 만큼 시작 활동에 열심을 보였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다행스럽게 자필로 3부를 남긴 시집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된다. 바로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어 윤동주가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 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된다. 주로 1938년 이후 1941년까지 창작된 시 작품들이다. 나는, 이 윤동주의 이 시들 속에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기에 그의 시들이 지금까지도 애송된다고 본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을 한 편 한 편 살펴보면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다룬 두 편 소설이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에 한 편이 이정명의 소설 <별이 스치는 바람>이다. 이 소설은, 죄수들을 대상으로 한 비인도적인 생체실험의 희생자로 28세 꽃다운 나이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 소설 속 화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헌책방에서 일하며 문학의 꿈을 키우다, 17세에 강제 징집돼 후쿠오카 형무소 간수병이 된 와타나베 유이치이다.

규슈대학 윤동주 시 전시장에서.

윤동주를 상기하게 하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연변 작가 김혁의 <시인 윤동주>이다. 소설가 김혁은 윤동주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 세계를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고찰한 자료를 가지고 소설을 집필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순국 70주년을 즈음해 윤동주 시인이 이렇게 조명되는 일은 정말로 다행스럽기만 한 일이다. 나는 연전에 윤동주의 독립 운동사를 다룬 연극을 감상한 적도 있었지만, 윤동주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추모식 행사장으로 옮긴 것은 오전 11시였다. 후쿠오카 형무소 담벼락에서 거행된 추모제는 엄숙했다. 참가자들이 윤동주 추모시를 낭송할 때는 분위기가 최고조로 고무되고 있었다. 점심 후에 자리를 옮겨 치러진 문학 강연회는 더욱 그랬다.

한국 영사관에서 관계자가 직접 나왔고, 우리 편에서는 김우종 평론가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친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의 운동주 시인에 관한 증언을 겸한 문학 강연도 있었다. 자국이 아닌 적국 일본에서의 윤동주 시인의 추모 행사라서 더욱 뜻이 있었다.

연변 용정중학교에서 추모와 함께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윤동주 시인의 후쿠오카 추모 행사의 기억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내 문학적인 역정에 길이 남을 것이다. 두 번의 여행지에서의 윤동주 시인에 대한 그날의 기억들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윤동주 시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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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은 1983년 월간 <아동문예> 소년소설부문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동화집 <꿈을 파는 가게>,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 평론집 <마해송 동화의 주제 연구> 등이 있다. 해강아동문학상, 김영일아동문학상, 호서문학상(소설부문), 대전시문화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으며, 대전・충남아동문학회장,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전문인총연합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문학시대문학상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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