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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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증명이다
  • 김형규
  • 승인 2018.08.13 14:3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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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36>산 로케 순례자 동상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안개에 싸인 오세브레이로 산타마리아 성당 입구에서 아들이 포즈를 취했다.

LU-633 도로를 따라 해발 1300m를 오르내리는 고산지대 마을 오 세브레이로와 리냐레스(Liñares)를 지나면 ‘해발 1270m 산 로케(Alto do San Roque)’ 표지판이 박힌 고개에 다다른다.

도로 좌측 유휴지에는 산티아고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포착한 순례자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강풍에 날아갈 듯한 벙거지를 왼손으로 누르고 나머지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터벅터벅 걷는 모습은 고행 그 자체다. 누군가 기운을 나눠주려 했는지 맨발에 샌들 차림의 동상 옆에 현대식 여름 트레킹화 한 켤레를 기부했다.

숙박시설이나 기능성 산행 장비가 뻔했던 과거 사람들에게 산티아고순례는 목숨을 건 고행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이 험난한 여정에 나선 것일까.

산 로케 고개에 세워진 순례자 동상 앞에서 아들과 멋진남님.
안개에 휩싸인 산 로케 순례자 동상.

문득 축구 해설가로 변신한 이영표의 멘트가 생각났다.
“월드컵은 경험이 아닌 증명하는 곳입니다”
스포츠치곤 다소 현학적인 해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 전 지나친 오 세브레이오의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멋진남님이 탈진 상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 장면이 겹쳐졌다. 월드컵에서 뭔가 보여주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성지에서의 경건한 기도 사이에 아련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만 같았다.

중무장한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포이오 고갯길을 올라가는 여성 라이더.
포이오 고개에 도착한 아들.

‘예정설’(豫定說)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운명을 태초에 결정해놓았다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구원받을지 여부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났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죄 때문에 스스로 죄의 경중을 따질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심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지옥에 갈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이 때문에 왕족이나 귀족들은 교황에 아부하거나 서민 고혈을 짜내 더 높은 교회를 짓고 금은보화로 성물을 만들어 바쳤다. 성직자가 되는 길도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위로받는 방편이 됐다.

돈도 빽도 없는 하층민들은 ‘흑수저라 안 되겠지’라고 체념하면서도 판도라 상자를 열 듯 혹시나 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농사짓고 가족 사랑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삶을 선택한다. 성경과 같은 삶을 살다 보면 스스로 자기최면에 빠진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사는 걸 보니 나는 구원받은 인간임에 틀림 없어.’

많은 학자는 예정설이 유럽인의 근면성과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 역할을 해 산업화로 급발전하는 동력이 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것저것 부족하다 싶으면 확실히 눈도장을 찍기 위해 산티아고순례라는 고행의 길에 나선다. 나태에 빠진 상류층보단 평신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운’ 것이다.

성 야고보를 찾아 850㎞의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 그들은 ‘오늘도 나는 여기 산티아고길에 있습니다. 내 죄를 용서하소서’ 하며 신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메시지를 들으려 했을 것이다. 설사 확답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할 일을 해냈다’는 자기만족에 행복해하지는 않았을까.

과거 유럽인들에게 ‘구원’은 ‘왜 사는가’의 해답을 찾는 키워드였다. 지금 생각하면 신의 굴레에 갇힌 가련한 인생이라 여길지 몰라도 동시대 대다수 세계인의 삶은 오십보백보였다. 세계가 맹신과 신분의 억압에서 해방돼 합리적 사고를 강조한 지는 엄밀히 따져 100년이 안 됐다.

곧이어 포이오 고개에 도착한 여성 라이더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정설에서 더 나아가 선민사상을 내세운다.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는다는 교리다. 지나친 선민사상 때문에 다른 민족의 핍박을 받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계약이며 유대민족으로서 당연히 헤쳐나가야 할 운명이라고 믿는다.

종교색이 빠지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우리나라 반상제도 등 신분제도는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현대인이 바라보기엔 단조롭고 안타까운 삶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신분제도가 허물어지고 세계관과 인생관이 확장된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예정설은 개나 물어갈 신화에 불과하다고 거들떠보지 않지만, 과거보다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과거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왜 사는가에 대해 하나하나 입증해가며 살고자 했다. 지금 우리는 증명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앞사람의 등짝만 보고 끌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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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K 2018-08-30 08:54:31
길지 않은 글이지만 많은 생각에 휩싸이게 하네요
저도 죽기 전에 제 삶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할텐데 하면서 말이죠,,

kusenb 2018-08-14 15:23:24
‘왜 이 길을 걷는가’에서 시작해 ‘왜 사는가’까지
이번호는 순례길에서 만난 동상을 통해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진교영 2018-08-13 15:45:26
왜 사는가 ?
지치고 힘들어도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긋고
구원받고 싶습니다 구원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을수 있을가요~

이번 회차 여행기 의미있게 일고 갑니다
무더위가 극심합니다
건강에 유념하시고 다음회 기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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