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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기쁨과 슬픔, 감정 불어넣는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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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기쁨과 슬픔, 감정 불어넣는 조각가
  • 유태희 문화예술전문기자
  • 승인 2018.07.2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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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문화 인물] 세종시 미협회장 이태근
조각가 이태근은 세종미술협회 회장이다.

세종시 미술협회 회장인 조각가 이태근의 작업실은 연서면 쌍유리에 있다. 미협 회원들이 만든 예술촌으로 예비군교육장 근처다.

쌍유리 예술촌은 2010년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태근 작가는 한적한 곳에 작업실을 지으려다 아내를 설득한 끝에 집까지 이사했다. 이 작가는 “공기가 좋아서 작업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조각은 언제 시작했나. 전공은 어디에서 했나.

“원래 어릴 때부터 조각이 좋아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화가가 되려고 했는데 대학은 목원대 조각과를 갔다. 군대를 갔다 와서 목원대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는데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는 행운을 얻었다.”

조각가 이태근의 아내는 서양화가 최희진이다. 이태근의 작업실 바로 옆에 ‘갤러리 FM98.5’를 운영하고 있다.

아내는 어떻게 만났나.

“학번은 저보다 2년 후배인데 졸업을 같이해서 동기생이 됐다. 내가 눈이 뒤집혀서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연애를 시작했는데 돈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어디 뾰족한 수가 있나? 저녁에 헤어져 집으로 가는 게 싫어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취직이나 해야 딸을 달라고 할 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조각 전공이 어디 마땅하게 기웃거릴 때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조금 한 다음에 결혼하려고 했다. 답답한 심정을 아내가 알아차렸는지 미루지 말자고 하더라. 그래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가장이라는 책임을 맡았으니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쓰리 잡(three jobs)’까지 했다.”

'불굴의 의지' 이태근

유영교 선생에게서 조각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이은기 교수 소개로 조각가 유영교 선생에게 도제 수업을 받게 됐다. 인연이 되려니까 그렇게 된 것 같다. 원래 소개할 때는 잠깐 흙 작업만 해달라고 했는데 인연이 되어 7년여나 선생님을 도와 돌 작업을 했다.

이제 독립해서 내 작업을 하고 싶다, 대학원 졸업 작품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다시 찾아오셨다. 혼자 못하니 도와달라는 거다. 하는 수없이 얼마간 더 도와드렸다.”

조각 장르가 화가와 비교해 수입도 떨어지는데, 비교적 순탄하게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편인가.

“아이고,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환경이 가장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는 강한 체력과 끈기를, 아내는 착한 심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 그나마 오늘이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했다. 독립했으니 다른 작가의 일을 도우면서 내 작업도 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른 작가들 일을 도와주고 나서 내 일을 하려니 피곤해서 할 수가 없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작업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 작업실이 갈운리라고 지금 호수공원 근처였다. 원래는 선배 작업실이었는데 내가 부탁을 해서 한편에 비닐하우스처럼 작업실을 조그맣게 만들었다. 참 힘든 시절이었다. 그때는 고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이 정도 고생쯤은 밥 먹듯 하고 창작 활동을 하지 않았겠나. 지나고 보니 새벽까지 컵라면 먹으면서 작업한 그때가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시치미’ 이태근, 백 대리석, 22×17×57㎝, 2003년.

그동안 전시회는 얼마나 열었나.

“앞서 말했지만, 밥벌이를 위해 남의 일 해주면서도 새벽까지 일한 것은 창작에 대한 열정이 밑바닥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 외에 살길이 없었기도 했지만, 예술에 대한 갈망이 없이는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없다. 2000년에 독립해서 갈운리에 비닐하우스치고 준비해서 첫 개인전을 서울 인사동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구와 부산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은 미루나무 갤러리와 10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데 세종시 미협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작업을 만만하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작품을 미루나무화랑에만 내고 있다. 가끔 간절하게 부탁해서 부산이나 서울 강남 등과 거래는 하지만 제대로 작품공급을 못 해줘 미안할 뿐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미협회장을 맡았으니 회원들의 권리증진을 위해서도 그렇고 아무튼 바빠서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면….

“뭐 작품세계랄 것은 없다. 그저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려 한다. 또 우리가 가진 감정이랄까 기쁨과 슬픔,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종교적인 접근을 시도해서 성경과 관련된 작업을 했었다. 특히 아담과 이브에 관심을 가졌다. 교회를 다니는 아내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아담을 많이 표현했다. 이를테면 아담이 이브의 유혹에 빠져 사과를 베물고는 들킬까 안 먹은 척하며 치부를 가리고 있는 포즈를 형상화한다든지, 토로스 위에 이브를 상징하는 사과가 놓이게 하는 그런 작업을 했다.

이어 발가락을 인간의 의지를 상징하는 데 쓰곤 했다. ‘뿌리’라고 쿤타킨테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도망가다가 잡혀 도끼로 발이 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형상화해서 인간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싶었다. 꽤 반응이 좋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이태근

미협회장으로서 지역작가들의 권익을 유별나게 애쓴 것으로 알고 있다. 미협회장으로서, 또 조각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얼마 전에 여기 쌍유리에 갤러리를 냈다. 시각예술이 활성화돼야 미협회원들이 나래를 펼 텐데,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종시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회장을 맡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됐다. 최근 시에서 호수공원 건너편에 작은 갤러리를 하나 마련해 주었는데 이건 작아도 너무 작다. 몇 번이나 세종시와 세종시문화재단에 내 뜻을 전달했지만, 제대로 된 전시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세종시가 행정중심복합도시인데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형편없다. 아마 잘은 몰라도 최빈국 수준이라고 투덜거린 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파리 에펠탑의 자산가치가 연간 127조라 하고, 모나리자로 인해서 얻는 1년 수입이 약 47조라고 한다. 그게 바로 문화예술의 가치인데 공무원들이 그 가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것인지 모른다. 오직 행정이라는 틀에 예술을 맞추려고 하고 있으니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역작가들을 너무 무시한다. 현재 세종시에 지어지는 모든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세워야 하는 조각을 지역작가들이 아닌 외부작가를 쓰고 있다. 이건 지역민을 살리는 것이 의무인 지방정부가 지역예술인들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지역이라고 꼭 집어 얘기는 못 하겠지만, 공원이 생기는데 조각은 왜 안 세우느냐고 물었더니 기증이나 재능기부를 하면 세워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벼농사짓는 농부에게 쌀을 빼앗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따진 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행복하려면 먹는 문제만 가지고는 안되지 않는가. 결국은 문화예술이 행복의 질을 결정하는 만큼 지역예술인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었으면 좋겠다. 조각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조각공원을 하나 세워서 세종시에 기부하는 게 꿈이다.”

‘설레임’ 이태근, 여산 대리석, 41×36×110㎝,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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