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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땀 범벅 '업힐', 찰나의 '다운힐'[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30>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다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세계 각국의 국기가 펄럭이는 만하린의 순례자 쉼터를 멋진남님과 아들이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멋진남님은 비록 1시간 늦게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지만 기다리는 우리를 위해 사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덕분에 남은 내리막코스에 몸을 맡기면 늦어도 오후 5시 이전에 폰페라다에 입성할 수 있다. 빠듯하긴 해도 오후 관광과 만찬까지 즐길 수 있는 시간대다.

오후 3시 30분 ‘철의 십자가’를 뒤로 하고 2㎞쯤 평탄한 고지대를 달리자 온갖 천연색 깃발이 나부끼는 만하린(Manjarín)이 나타났다. 언뜻 우리나라 오방색 천이 휘날리는 성황당과 비슷했다.

가까이 살펴보니 세계 각국의 국기였다. 이 일대는 거의 폐허인데 일부 건물을 손질해 순례자 쉼터로 활용하고 있었다. 입구 중간에 빛바랜 태극기도 눈에 띄었다. 뒤에 걸린 흰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문양의 플래카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템플기사단’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듯했다.

1500m의 고지대에서 풀을 뜯는 소떼.
스페인 고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의 표피에 곰팡이 같은 허연 이끼가 달라붙어 있다.

플래카드와 나무판자 안내판에 ‘템플기사단’을 뜻하는 ‘TEMPLARIA’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 활약한 ‘템플기사단’은 1314년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숱한 미스터리를 남겼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폰페라다에 입성한 후 추적해보기로 하자.

만하린 이후부터는 급격한 내리막이다. 5년 전 경북 영주 일대 옥녀봉-저수령-죽령 구간 100㎞의 도로를 달리는 백두대간 그란폰도에 출전한 적이 있다.

아마도 저수령을 넘어 길게 뻗은 내리막 직선 구간이었을 것이다. 속도계를 힐끔 보니 시속 80㎞를 가리켰다. 대회 주최측이 차량통제를 해줬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산지 내리막에선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빠르다. U턴에 가까운 굽잇길에선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훨씬 날렵하게 회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LE-142번 도로는 기본적으로 산티아고 도보순례길을 따라가지만 합쳐졌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차도가 도보순례길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지형이 난해하다는 얘기다. 일부 도보순례자들은 이곳을 자동차의 도움을 빌려 통과한다.

산티아고순례길 고지대의 고즈넉한 마을로 유명한 엘 아세보 마을 초입.
아들이 엘 아세보 마을 안길을 통과하고 있다.
엘 아세보 주택의 대문은 우리나라 1970년대 이전 농촌 모습과 유사하다.

아기자기한 산세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스페인의 산지는 스케일이 크다. 우리나라는 뱀처럼 구불구불해 브레이크를 수시로 잡아야 하지만 스페인은 완만하게 쭉 뻗은 편이다. 가속이 붙는 대로 내버려 두면 시속 100㎞를 쉽게 넘길 것 같지만 참아야 했다. 아들과 멋진남님은 내리막 경험이 많지 않아 위험천만이다.

만하린에서 7㎞쯤 내달리다 급한 굽잇길 아래로 그림 같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엘 아세보(El Acebo)였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엘 아세보는 곳곳에 휴식과 간식을 먹는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이곳에는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에 올랐다가 사망한 독일인 하인리히 크라우스를 기리는 자전거상이 세워졌다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느라 간과한 모양이다.

몰리나세카 마을 입구 표지판. 여기서 4㎞쯤 더 가면 오늘 종착지 폰페라다가 나온다.
몰리나세카는 마을을 우회하는 메루엘로강으로 유명하다.

색깔이 아름다운 지붕을 자랑하는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ós)와 목가적 풍경의 메루엘로 강(Río Meruelo)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을 지나치자 금세 폰페라다(Ponferrada)에 도달했다. 몰리나세카의 다소 복잡한 마을 안길에서 3㎞ 정도 엉뚱한 길로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박진감 넘치는 다운힐을 즐겼을 터였다.

방향을 잘못 읽어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접어들었을 때 마침 맞은편에서 낡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던 소년이 없었더라면 시간이 한참 지체됐을 것이다. 소년은 우리의 다급한 도움 요청에 핸드 브레이크로도 역부족했던지 앞으로 고꾸라질 듯 양발을 콘크리트 바닥에 마찰해가며 자전거를 다급히 세웠다. 신기술의 발견이었다.

드디어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 5분까지 9시간 35분 동안 106㎞를 달려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80여㎞의 완만한 업힐에 비해 20㎞의 짧고 급한 내리막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들은 허탈한 표적이 역력했다. 막판 다운힐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모양이다.

업힐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고 내리막에서 상응하는 보상을 기대했건만 공들인 시간과 피땀에 비해 희열은 찰나였던 것이다. 급전직하. 수십 년간 눈칫밥 먹으며 인생의 정점에 어렵사리 기어올랐건만 한순간 와르르 추락하는 흙수저들의 삶과 무엇이 다르랴. <계속>

김형규  tjkhk@daum.net

<저작권자 © 세종포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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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 JC 2018-07-06 20:17:11

    템플기사단 ! 벌써 궁금해진다.   삭제

    • 진교영 2018-07-03 14:44:04

      어느때보다도 생생한 여행기입니다 내가 순례자가되어 바로 그곳에 있는듯 하네요
      자전거로 내리막 80~100km 면 정말 후덜덜 하지요 조심 또 조심 해야합니다
      하인리히 크라우스상을 못보셨다미 많이 아쉬우셨겠네요 소년의 자전거 브레이킹 신기술을 머리속으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ㅎㅎㅎ

      업힐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고 내리막에서 상응하는 보상을 기대했건만 공들인 시간과 피땀에 비해 희열은 찰나였던 것이다. 급전직하. 수십 년간 눈칫밥 먹으며 인생의 정점에 어렵사리 기어올랐건만 한순간 와르르 추락하는 흙수저들의 삶과 무엇이 다르랴.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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