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딱고개’ 겨우 넘은 순례자들의 돌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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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 겨우 넘은 순례자들의 돌무더기
  • 김형규
  • 승인 2018.06.25 16:2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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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29>철의 십자가와 서낭당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철의 십자가 앞에서 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들은 멋진남님을 마중하러 폰세바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라이딩은 80㎞ 지점인 폰세바돈만 도착하면 마무리한 거나 다름없다. 나머지는 평탄한 고원지대와 급내리막이다. 대략 15㎞에 달하는 내리막 구간은 표고 차가 무려 1000m다. 자전거 내리막길을 다수 경험했지만, 이 구간처럼 길고 급한 내리막은 처음이라 가슴이 설렜다.

멋진남님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나긴 오르막길이라 그 연배에는 힘겨울 것이다. 나와 아들은 햇빛에 노출된 폰세바돈의 언덕을 피해 1㎞쯤 떨어진 이 일대의 랜드마크 ‘철의 십자가’(Cruz de Fierro)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철의 십자가는 우리나라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서낭당(성황당)을 연상케 했다. 경주의 왕릉보다 조금 더 큰 듯한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기둥은 이름처럼 쇠가 아니라 원통형 나무였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11세기에 세워진 십자가 진품은 아스토르가 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현재의 것은 복제품이란다.

취업을 염원하는 한국 청년들이 철의 십자가를 다녀갔다. 지금쯤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곳에서도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는 속 깊은 딸의 정감이 묻어나는 돌이다.
우측 하단에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성가 제목을 적은 조약돌이 눈길을 끈다.

철의 십자가를 에워싼 돌무더기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각자의 염원을 돌에 적어 던진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일대는 돌이 흔치 않아 각자 고향이나 인근 지역에서 미리 준비해온다. 순례자의 진을 빼는 ‘깔딱고개’를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과 남은 여정의 무사 귀환, 신에 대한 경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돌멩이에 담았을 것이다.

십자가 밑동까지 올라가 허리를 구부리고 돌에 새겨진 글씨를 찬찬히 훑어보는데 간간이 한글이 눈에 잡혔다. ‘취업 필승’이란 문구에선 요즘 우리나라 청년취업난을 여실히 보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오죽 간절하고 답답했으면 여기까지 걸어와 기도했을까. 어느 딸은 부모와 할머니, 오빠, 삼촌, 외숙모의 행복과 건강을 빌었다.

영어로 ‘Lord, Make Me A Channel of Your Peace’라는 문구를 던진 서양 순례자의 돌도 눈에 띄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인용한 성가(聖歌)였다. 주로 세계평화를 기원할 때 부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출신 가수 수잔 보일이 부른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있는데 서정적 목소리와 잔잔한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조약돌이 대다수지만 뜬금없이 수박통만한 돌도 몇 개 보였다. 직접 메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잔머리’ 굴리는 부류는 세계 어딜 가나 다 있는 모양이다.

순례자들이 십자가 나무기둥에도 많은 기념표식을 매달아 놓았다.
세계 각국의 깃발이 나부끼는 ‘만하린’ 순례자숙소. 가운데 태극기도 보인다. 시설이 낡아 숙박하려면 다음 마을 ‘엘 아세보’로 가는 게 낫다.

옛날 과거를 보러 가거나, 상단에 끼어 한양에 가는 도중 잠시 땀을 식히는 고갯마루에는 대게 돌탑이 있었다. 가쁜 숨이 가라앉을 무렵 나그네는 소박한 소망을 담은 돌 하나를 더 얹고 길을 떠났다. 동네 어귀에 수호신처럼 형성된 서낭당은 마을 공동의 재앙과 귀신을 막는 토속 신앙적 요소가 강하지만 불특정다수에 의해 쌓아 올려진 외딴 고갯마루의 돌탑은 개개인의 소망이 응집된 것이다.

꽤 오래전 열대기후인 말레이시아에서 해발 1700m 고지대에 위치한 ‘겐팅하이랜드’라는 휴양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호텔과 테마파크, 골프장, 카지노 등을 갖춘 이곳을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는데 굽잇길마다 키 작은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들은 바로는 아랫마을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겐팅하일랜드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하나씩 쌓은 돌탑이란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버스요금을 아끼면서까지 저 높은 카지노를 향해 터벅터벅 기어 올라가는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철의 십자가 근처에서 순례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이 걸터앉은 곳은 17세기 만들어진 ‘순례자 해시계’다.

철십자가 주변의 말 농장을 둘러보고 17세기 순례자들이 도착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땅바닥에 설계된 ‘해시계’(Reloj analemático)를 흥미롭게 관찰하는데 멋진남님이 도착했다.

입에서 단내가 나는 듯한 그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철의 십자가를 보자마자 성호를 그었다.
“허허, 죽을 뻔했네. 오래 기다렸지.”
그는 멋쩍게 웃으며 철의 십자가와 돌무더기에 감탄사를 쏟아냈다. 산티아고 완주는 문제없어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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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교영 2018-06-27 06:07:17
좋은곳에 취업하는게 간절한 소망이 되어버린 현실이 안타갑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좀더 나은세상을 물려줘야하는데

JC 2018-06-26 20:04:32
15km 내리막이라 라이딩에는 큰 도움이 되었겠다는 생각과 또 그만큼을 올랐을 고생을 생각하니 -.-
철 십자가가 인상적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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