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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에 뜬 무지개, 그리고 노란색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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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에 뜬 무지개, 그리고 노란색 리본
  • 김형규
  • 승인 2018.05.29 10:4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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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25>소나기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레온을 출발하기에 앞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멋진남님.

레온의 새벽 날씨는 전날에 이어 불안정했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순례자들의 발길을 묶었다. 일부는 우의를 걸치고 길을 나섰으나 우리는 빗줄기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오전 7시 30분이 되자 동쪽 하늘부터 빼꼼 햇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느라 전날보다 출발시간이 30여 분 지체돼 중간에 비를 맞더라도 라이딩을 강행했다.

엿새째 여정은 폰페라다까지 100여㎞를 달려간다. 주로 순례길 옆에 놓인 120번 도로를 따라 달리면 된다. 단순한 코스이지만 후반부에는 해발 1600m에 달하는 고산지대를 통과한다.

레온 시내를 벗어나 근교 마을 트로바호 델 카미노(Trobajo del Camino)를 지나자 정들었던 120번 도로와 다시 만났다. 이후부터 120번 도로와 나란히 가는 순례길 코스는 거의 직선으로 뻗어있다.

아들이 소나기가 강하게 내려 라이딩을 중단하고 폐주유소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출발한 지 30분도 안 돼 라 비르헨 델 카미노(La Virgen del Camino) 마을을 지나면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내리는 소나기인 줄 알았지만, 발데르데 데 라 비르헨(Valderde de la Virgen) 마을을 지나고 산 미겔 델 카미노(San Miguel del Camino) 마을을 지나면서 노골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아들의 자전거는 우천에 대비해 빗물받이용 펜더를 설치했지만 나와 멋진남님은 그러지 못했다. 빗물이 앞뒤 바퀴를 타고 얼굴과 등줄기에 튀었다.

하늘을 보니 지나가는 비인 게 분명한데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다. 빗방울이 시야를 가리고 출근길 차량에서 튀는 빗물로 인해 더 이상 라이딩이 불가능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낙뢰까지 떨어져 대피처를 찾았지만 보이는 건 들판과 도로, 질주하는 차량뿐이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걷는 도보순례자들.

오도 가도 못 하고 비를 쫄딱 맞아가며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비 피하기를 단념할 즈음 도로변에 오래전 문을 닫은 듯한 폐주유소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난데없는 폐주유소라니.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아들은 한기가 올라오는지 급한 대로 빗물을 털어내고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오늘 하루 라이딩도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아들 얼굴에 드러났다.

출발한 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온몸이 젖었다. 빗물이 흠씬 배인 엉덩이와 신발이 문제였다. 20분 정도 지나자 비구름이 걷혀 곧장 출발했다. 아직 도로바닥에 고인 빗물이 바퀴를 타고 얼굴을 때렸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비가 그치자마자 다시 시작된 라이딩. 서쪽 전방 하늘에 무지개가 선명하다.
비가 그치자 지팡이를 짚고 다시 걷기 시작한 초로의 순례자. 배낭은 레인커버가 씌워져 있다.

비기 그치자 들판은 순식간에 화사한 빛으로 뒤덮였다. 어디에 피신해 있다 나오는지 120번 도로 옆으로 난 순례길에 많은 도보순례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반가움에 “부엔 카미노”를 외쳤다.

아들이 “아빠, 저기요”하며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처음엔 빈 하늘로 보였다. 멋진남님이 “허허, 무지개네”하고 활짝 웃었다.

지평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청명한 벌판에서 저렇게 온전한 반원 무지개를 목격했던 적이 있던가. 어릴 적 고층빌딩이 많지 않았던 시골들판에서 한 번쯤 봤던 기억이 있는 듯했다. 페달링을 하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에도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선명하게 드러나길 소망하면서.

날씨가 개자 순례자들이 120번 도로 옆으로 난 산티아고길을 걷고 있다.
부부로 보이는 순례자거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고 있다.

비 때문에 일정에 다소 차질이 빚어졌다는 조급함에 페달링이 바빠졌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áramo)와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ín del Camino),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마을을 거침없이 지나쳤다. 마음 편히 내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120번 도로 바로 옆에 늘 포근한 도보순례자길이 함께 따라왔기 때문이다.

레온에서 50㎞쯤 떨어진 역사문화 도시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아스토르가를 5㎞쯤 남겨둔 지점을 알리는 하얀 이정표를 발견하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새로운 힘이 솟았다. 무지개를 목격한 자만이 얻는 마법의 힘일지 몰랐다.

아스토르가를 앞둔 산티아고 순례길표지판에 누군가 세월호 리본을 붙였다.

순간, 나는 라이딩을 멈추고 조금 전 지나쳤던 산티아고순례길 표지판으로 되돌아갔다. 순례길에서 수없이 마주친 평범한 표지판이었건만 이번만큼은 뭔가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언뜻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던 표식을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지난 몇 년간 전 국민을 슬픔에 빠뜨렸던 기다림의 상징, 노란색 리본이 붙어있었다. <계속>

레온-폰페라다까지 자전거로 달린 궤적. 아래 고도표를 보면 후반부에 해발 1600m까지 올라갔다가 급하강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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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교영 2018-05-30 19:54:15
아무래도 타지에서 라이딩도중 비를 갑자기 만나면 정말 힘들죠 고생하셨지만 아스토르가 까지 무사히 당도 하셨길 ~ 무지개를 보셨으니까요

노랑리본이 왠지 다음편은 많이 슬플듯해요

조용만 2018-05-30 05:54:51
부엔 카미노

잘 보고 갑니다..^^

kusenb 2018-05-29 11:58:53
좋은 글 매주 잘 읽고 있습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무지개의 행운이 한국에서도 계속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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