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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한 믿음은 자기를 버리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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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한 믿음은 자기를 버리는 것부터
  • 김형규
  • 승인 2018.03.19 08:4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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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15>나르키소스 선물하기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밀밭을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부르고스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회전교차로에서 다른 길로 돌아가는 자전거순례자들. 잠시 후 순례자 사무소에서 다시 만났다.

산토도밍고를 벗어난 120번 도로는 그라뇬(Grañón) 마을을 지나 레데시야 델 카미노(Redecilla del Camino) 마을로 들어섰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도보순례자길이 이 마을에서 다시 합류했다. 마을 초입에 산티아고순례자를 위한 안내사무소가 우릴 반겼다. 캄캄한 초행길에서 만난 관광안내소처럼 반가웠다.

친절한 여직원이 순례자들을 위해 인증 스탬프를 찍어주고 식사와 숙소정보를 제공했다. 각종 리플렛 등 안내서도 꼼꼼히 챙겨줬다. 도로를 달리는 낯선 자전거순례자에게도 이런 온정의 손길이 자주 닿으면 좋겠다.

사무소 건물 그늘에서 수박으로 수분과 당을 보충하는데 3명의 라이더가 뒤따라왔다. 첫눈에 봐도 내공이 깊은 유럽 라이더들 같았지만 자전거는 평범한 생활자전거였다. 수백만원대의 고가 자전거로 원정 라이딩을 나서는 우리나라 풍토와는 사뭇 달랐다.
 
눈인사로 상견례를 한 그들은 아들과 내가 타고 온 미니벨로에 관심을 보였다. 조막만한 자전거로 산티아고순례길을 도전한 게 의아했던 모양이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앞서가던 일행이었다. 우리처럼 회전교차로에서 헤매다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그 사이 우리가 앞질렀으니 자존심이 구겨졌을 것이다.

‘레데시야 델 카미노’ 입구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순례자 안내사무소.
순례자 안내사무소 옆 그늘에서 시원한 수박으로 수분을 보충했다.
도보순례자는 물론 자전거순례자도 안내사무소에서 인증스탬프를 받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조금 전 앞서 갔던 라이더들.

생활자전거로 즐기는 순례라이딩 

레데시야 델 카미노 마을의 뒷골목은 마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유서 깊은 건물에 알베르게, 카페까지. 밤이었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명작 ‘카페테라스’가 떠올랐을 것이다. 1800년대 후반 인상파 화풍에 영감을 준 게 일본이었다. 우리는 그때 무얼 했을까.

하룻밤 머물고 싶었지만 부르고스까지 달려야 한다는 마음에 다시 120번 도로로 빠져나왔다.

라이딩은 지금부터다. 하루 100㎞정도를 달린 지점이지만 남은 30㎞ 거리의 난이도가 상당하다. 해발 300m대에서 시작해 1300m까지 기어 올라가야 했다.
 

120번 도로 옆으로 난 비포장길을 걷는 순례자들. 부르고스 앞 ‘라 페드라하’ 이정표.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오르기 전 마을에서 아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벨로라도(Belorado) 마을을 지나친 120번 도로에 차량이 갑자기 증가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트럭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산토도밍고를 지나자마자 12번 고속도로가 120번 도로로 흡수돼 병목현상이 빚어진데다 남북으로 교차하는 지방도로에서 유입된 차량까지 가세했다.

해발 1000-1300m 구간 왕복 2차선의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와 페드라하 언덕길(Puerto de La Pedraja)은 도로보수공사까지 하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됐다. 대형트레일러가 붐비는 도로 업힐은 라이더를 위축시켰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로 가는 오르막길. 도로 덧씌우기 공사 중이어서 차량통행이 혼잡했다.

완만한 오르막에서 15㎞ 정도 가파른 업힐이 시작되자 아들과 멋진남님의 간격이 벌어졌다. 멋진남님은 “나는 알아서 갈 테니 먼저 가”라고 우리를 밀어냈다.
“외길이라서 딴 길로 벗어날 걱정이 없으니 천천히 오면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앞서 나갔다.

70대의 멋진남님은 자신의 연령대에 맞는 라이딩법을 알고 있다. 남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지만 동료들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걸 믿고 있다. 아들과 나 역시 멋진남님이 포기하지 않고 뒤따라온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 조금씩 스스로를 버린 것이다.

자기애를 선사한 호수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를 넘어 해발 1150m의 ‘라 페드라하’ 고개.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호수를 찾은 나르키소스는 결국 호수에 빠져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을 그의 이름을 따서 수선화(나르키소스)라 불렀다. 여기까지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나르키소스는 정신분석학 용어로 ‘나르시시즘’(자기애)으로 회자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 서문에서 아일랜드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이야기를 빌어 색다른 해석을 내놨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 왔고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오레이아스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숲의 요정들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연금술사 서문 中>

역사도시 부르고스 입성. 일명 부르고스 대성당으로 부르는 산타마리아 대성당 앞에서.

페드라하 언덕에서 10여㎞을 신나게 내려가 부르고스성 직전 마을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유럽의 역사도시 부르고스로 입성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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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2018-03-31 12:39:28
경치 날씨 다 좋네요, 스탬프는 요즘 스마트폰에 찍는 디지털 스탬프도 있더군요

이재규 2018-03-20 12:35:00
스템프찍는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정작 목표를 잊고 스탬프만 열심히 찍는 우를 범하게 되죠.
예전 국토종주를 하며 느꼈던 부분인데 산티아고순례하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작가님처럼 주변을 보고, 느끼며 다니는것이 가장 바람직하죠.

조용만 2018-03-19 17:21:40
생생한 라이딩
감동적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진교영 2018-03-19 12:08:28
무조건 고가의 자전거만을 선호하는 우리들과 달리 그들에 문화가 부럽네요
실패한 사업이지만 4대강 국토종주 등에서 한국도 스템프확인 쉼터 숙식안내 길안내 여행문화안내등 전반적인것에 대해 만족할만한 높은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할텐데 말이죠
많은생각을 하게되는 이번 여행기 관심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kusenb 2018-03-19 11:45:57
순례길 주변의 풍광도, 옛 모습을 간직한 스페인 도시들도 아름답지만
이번 편은 같은 길을 달리고 있는 동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속도로 천천히 달리는 멋진남님의 지혜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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