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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가 영원할 것이란 무모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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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가 영원할 것이란 무모한 확신
  • 전재홍
  • 승인 2018.03.01 17: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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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9>대륙침탈의 서곡, 만주전쟁
전재홍 근대도시문화연구원 원장 | 건축공학박사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제가 중국침탈의 서곡을 울린 만주전쟁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카터 에커트가 쓴 책 표지의 박정희. 경북 문경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신경으로 간 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만주사변과 부의황제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을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실직했고, 굶어 죽는 농민도 많았다. 일본 정부의 무대책에 평소 불만이 많았던 군부가 목소리를 내어 만주에 대한 식민지배를 주장했다.
 
일본 관동군은 자작극을 꾸며 실행에 옮긴다. 1931년 9월 18일 밤 봉천(현 심양) 교외에서 만주철도 선로를 고의적으로 폭파시킨다. 현장에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힌 시체 3구를 두어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이를 구실로 봉천시를 비롯해 만주철도 노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9월 21일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인 하야시 센주(林銑十郞)로 중장이 군대를 이끌고 독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전선은 남만주 전체로 확대되었다.

중국 봉천(현 심양)역 앞의 마차. 손님을 기다리는 사이 여물을 먹고 있는 말.
봉천역에 정차한 급행열차. 증기기관차에서 연기가 오르고 그 뒤로 객차 7량이 매달려 있다.

이듬해 일본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천진에 있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로 데려와 만주괴뢰국의 황제로 앉혔다. 이로써 만주국의 실권을 장악했고 일본 재벌이 진출해 만주지역의 경제를 지배했다.

부의황제의 통치, 거주공간이었던 황궁은 현재 만주국 황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1년 전재홍의 사진.
서양식 2층 규모인 근민루에서 집무 접견 연회가 행해졌다. 2001년 전재홍의 사진.
부의와 황후의 거처로 사용된 집희루. 2001년 전재홍의 사진.

지금도 만주국 옛 수도인 장춘에는 당시에 건축된 수많은 관용, 군용청사가 현존한다. 이러한 규모로 도시를 계획하고 대규모 석조 건축물을 세운 것은 식민지배가 영원하다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글은 단어로만 존재하는가보다. 10여년 뒤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인들은 돌아가고 남은 건축물은 역사를 실증해 준다.

구 만주국국무원(爲滿洲國國務院) 전경. 촬영당시 길림대학교.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만주국국무원(爲滿洲國國務院) 원경. 촬영당시 길림대학교.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만주국경제부(舊 爲滿洲國經濟部). 촬영당시 길림대학 제3병원 입원부와 길림성 외과 연구소.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관동군 현병총부 청사(舊 關東軍 憲兵總部 廳舍). 촬영당시 길림성인민정부.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강덕회관(舊 康德會館). 촬영당시 장춘시 청사. 1935년 건립해 일본재벌 등 고급 손님들에게 숙식과 교통, 통신 서비스를 제공했다.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일본관동군 사령부(舊 日本關東軍 司令部). 촬영당시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청사.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위만주국최고법원검찰(舊 爲滿洲國最高法院檢察) 정문. 당시 만주국 최고재판소, 최고검사청, 신경고등재판소, 고등검사청, 지방재판,소 지방검사청이 있어 종합재판소로 불리었다. 촬영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제461의원으로 사용.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위만주국최고법원검찰(舊 爲滿洲國最高法院檢察).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위만주전신전화주식회사(舊 爲滿洲電信電話株式會社) 건물. 촬영당시 길림성 전신공사 장춘분공사로 사용. 회사는 1933년 설립되어 건물은 1935년 준공했다. 만주국 당시 전전대루(電電大樓)라는 건물로 불리었고 위만주중앙방송국도 같이 사용했다.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위만주우편국(舊 爲滿洲郵便局). 촬영당시 중국이동통신 장춘 서안대로점으로 사용.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업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경군관학교가 장춘에 있다. 정확한 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滿洲國 陸軍軍官學校)이다. 일제가 1939년 새로운 수도 즉, 신경(新京)에 설치한 군관학교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7기생을 배출했는데 학생 구성은 일본인과 일본 점령지인 타이완과 한반도, 중국인이다. 제1기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계가 172명이다.

조선인 생도들은 일본인, 중국인보다 두각을 나타냈다. 1기 박임항, 2기 박정희, 4기 장은산, 5기 강문봉이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생은 후에 대한민국 군과 정계, 관료진출자가 많았다. 1기생 김동하 박임항 윤태일 이기건 이주일은 육군과 해병대에서 장성, 장관, 국회의원, 감사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누가 뭐래도 만주군관학교 출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2기생 박정희다.
 

구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본부. 촬영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원.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강당. 촬영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원. 2001년 전재홍의 사진.
구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병사숙소. 촬영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원. 2001년 전재홍의 사진.
1939년 3월 일본인들이 발행한 만주신문에 박정희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군관지원의 각오를 다지며 혈서를 썼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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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식 2018-03-02 10:14:36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과거의 흔적을 잘 기록하시고 꼼꼼하게 잘 설명해주셔서 읽고 보고 즐기기 너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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