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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자들로 가득한 세계[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포트리에의 ‘인질들’
유현주 미술평론가 | 미학박사

“[…]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고도를 기다리며>중)

“왜 사는가?”
살면서 누구나 가끔 이런 질문을 받거나 자문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최대한 행복하게 공존하길 원한다. 그러나 ‘왜’ 혹은 ‘무엇을 위해’ 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답할 수 없는 근본적인 공허함 같은 것이 우리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부조리’라는 말로 설명한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까뮈는 “합리성이란 비합리적인 것과 별개가 아니라 부조리한 것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나 세계가 그 자체로서 부조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즉 ‘모순되는 두 대립 항’의 공존 상태가 인간의 내적인 구조 자체, 바로 부조리한 것이다. 예컨대 평범한 사람이지만 분열된 자의식을 보여주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반복할 때, 이는 단적으로 이성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이 공존하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림의 행위, 부조리의 삶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는 바로 그처럼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권태롭고 정체된 일상 속에서 표출되는 인간 내면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는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통해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고독과 허무의 존재 상태를 드러낸 이 연극은 우리에게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묻게 한다.

우선 이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그를 기다리는 이 두 주인공들의 대화가 흥미롭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는 서로 이어지지 않고 도중에 자주 끊어지며 반복되거나 문득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관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로 끼어드는데, 끊어진 대화 사이에 관객과 주인공들 사이에 불안과 긴장이 발생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 실존의 한 형태라는 암시가 거기 있다. 그런데, 관객도 주인공들도 심지어 베케트 자신도 모른다고 한 고도라는 인물을 왜 그들은 끝없이 기다리는 것일까?

연극에서는 약 5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기다림 가운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몇 번인가 이유 없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들이 기다림에 지칠 때 쯤 고도의 심부름꾼인 듯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못 오지만 언젠가 올 거라는 암시를 주자 이로써 이 두 사람에겐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제공된 셈이 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를 원작으로 체코 연출자 오토마르 크레츠카(Otomar Krejca)가 1978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연극 장면. 에스트라공 역의 루푸스(Rufus)와 블라디미르 역의 조지 윌슨(Georges Wilson). Ⓒ페르낭 미쇼(Fernand Michaud).

한편 다른 두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는데, 독재자 같은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는 어디론가 여행 중에 나타나서, 포조는 럭키에게 춤을 추라고 명령하거나 큰 소리로 생각하라고 고함치는 등 광포한 인간성의 극단적인 면을 보여준다.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들 같이 대사를 내뱉는 이들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허무주의적이고 실소를 금치 못할 정도로 희극적이며 동시에 고통스럽게 느껴질 만큼 비극적이다.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번역한 오증자 교수의 말을 따르자면, 베케트는 나치의 폭력과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경험한 타인의 고통, 즉 인간의 공포와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이다. 실제로 베케트가 그가 쓴 글 속의 소수인들, 즉 부랑자, 노인, 소외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등장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나는 고통스럽다 그러기에 존재한다’로 바꾸어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고통의 실존은 사무엘 베케트의 문학에 흐르는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은 고통의 존재라는 생각이 베케트의 문학에 짙게 깔려 있다는 얘기이다.

나치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시대를 살았던 문학가이자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했었던 작가의 경험이 그의 소설을 실존주의와 부조리문학으로 분류하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처럼 베케트의 작품들이 불안한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이 낳은 문학이라고도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더욱 증폭된 인간 내면의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의식구조에 작가가 근본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3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처음으로 부조리극을 선보인 이후로, 실제로 앙티테아트르(anti-théâtre)라는 연극, 즉 전통적 연극에서 중요시하는 인물성격이나 내용전개 혹은 주제를 무시하는 연극이 활성화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미술에서는 앵포르멜이라는 장르에서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추상화 한 양식들이 나타난다. 베케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필자에게 떠오른 화가는 앵포르멜(Informel)의 작가 장 포트리에이다. 아일랜드가 낳은 노벨문학수상자인 베케트와 프랑스의 앵포르멜의 선구자인 장 포트리에는 삶도 예술도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인질, 역사의 상처를 드러내는 얼굴들

장 포트리에는 1909년 파리 출생으로 영국의 왕립미술학교와 스레드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입대 후 전선에서 중상을 입었던 그는 1920년 파리로 다시 돌아와 표현주의 작품을 제작하다가 1928년 대상의 형체를 완전히 지우는 앵포르멜 미술의 기수가 된다.

포트리에 역시 베케트처럼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운동에 투신하면서, 파리 교외의 샤트네에 은신하면서 연작(連作) <인질(人質)>을 제작하였다. <인질> 시리즈를 선보였던 1945년 파리에서의 개인전은 엄청난 주목을 끌었다.

그 그림들은 캔버스에 종이, 석고 등을 발라 칼로 긁고, 물감이나 파스텔로 채색한 것들이었는데, 주로 전쟁에서 겪었던 참상을 연상시키는 비참한 얼굴들이다. 석고와 석회가 두껍게 발라진 화면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 혹은 물질로 짓이겨진 이름 모를 형상과 같고, 오래된 화석처럼도 보인다.

‘인질의 머리(Head of a Hostage)’(1944) | THE NATIONAL MUSEUM OF ART, OSAKA. &copy;ADAGP, PARIS & JASPAR, TOKYO, 2014. D0520

포트리에가 표현한 이 같은 화법은 동시대미술에서 ‘마띠에르’라고 부르는 것인데, 과거와 달리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물질이 된 느낌을 준다. 즉 두터운 물감 칠이 이질적인 것들과 혼합되어 - 과슈, 석고반죽, 가루염료, 니스, 잉크 등 - 두터워진 화면은 무엇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어떤 행위의 흔적을 남긴 물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앵포르멜의 또 다른 작가인 장 뒤뷔페는 심지어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을 섞어 두껍게 발라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이질적인 물건들이 섞여진 그림은 그 특수한 질감 때문에 하나의 추상화라고 불리기보다는, 형태가 사라진 ‘또 다른 예술(L'artautre)’이라고까지 불린다.

실제로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M.타피에는 이러한 경향의 화가들의 그룹전을 기획하고 소책자 <또 다른 예술:un art autre>(1952)을 발간하고 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앵포르멜(非定形)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포트리에가 그린 인질의 얼굴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보자. “이제 모든 채색된 덩어리들 안에서 신체의 잠재성과 역사의 의미의 잠재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붉은 혹은 파란색의 얇은 선은 포트리에의 두꺼운 반죽에서 인질의 모습을 솟아나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란 모양의 규칙적인 타원형에서 <총살된 자>의 석고의 두툼한 물감 층을 둘러싸고 있는 톱니모양의 선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더 이상 어떤 인간적인 형태를 상기시키지 않는다.”(자크 랑시에르 <역사의 모습들에서>)

형태가 파괴된 이 얼굴들은 “돌 안에 화석화된 고사리의 훈적 혹은 죽은 동물의 광물로의 회귀”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물질이 형태를 모방해가는 가운데, 역사의 모습들이 물질을 밀고 나오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포트리에의 <인질>들은 어떤 형태를 그린 것이라기보다 작가의 고뇌가 충만한 물질덩어리의 몸이었고, 그 몸이 역사의 고통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베케트의 언어들이 단절되고 불연속적인 가운데 침묵과 반복이 이어져서 인간 실존의 어두운 면을 들추어냈다면, 포트리에의 <인질>은 물질을 밀어내는 역사의 언어가 있다. 이들 작품 속의 기괴한 모습들은 모두 아픈 역사로부터 시작된 인간 실존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우리는 어떤 기다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일까? 여전히 세계는 고통 받는 자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또 어떤 인질로 살아가는 것인지 포트리에의 시어로 반성해 보면 어떨까.

유현주  adorno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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